명량을 보고
21세기 대한민국 메이저 영화에서 아직도 손발이 오그라드는 장면들을 습관적으로 연출하는 감독을 봐야 한다는 게 씁쓸하다. 이 감독의 전작인 활은 재미있게 보았다. 베꼈다고 하는데, 잘 베낀 것 같다. 아무튼 그럭저럭 재미있었다.
명량은 초반 구루지마와 와키자카 패가 신경전을 벌이는 장면부터가 상투적이서 염려가 됐는데, 아니나 다를까, 임머시기 정보원과 여배우 이정현이 나오는 장면들은 하나 같이 신파 그 자체, 얼굴 보기가 민망할 정도여서 이 분들은 좀 안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듦. 이순신 아들로 나오는 사람 연기가 학예회하는 분위기 내지는 신인 오디션하는 삘. 이 분이 백성들 틈에서 얼빵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장면은 그야말로 안습 분위기. 여기에 쌍팔년도 슬로모션에 비장한 음악까지 더해져서 우스꽝스러움을 가중시킴. 전쟁 장면은 돈 문제가 걸려 있으니 어설퍼도 인정한다 쳐도, 칼질하는 시늉만 하는 롱테이크는 무슨 배짱인지. 고증에 충실했다고 하는데, 배설을 왜 안위(?)가 죽이는가. 역사를 왜곡하면서까지 꼭 죽여야 할 필요성이 있는 장면도 아니었는데...
두려움을 용기로 바꾼다는 대사 부분은 서너 차례 나오는데, 마지막에 이순신 대사를 보니 왜 그렇게 반복했는지 눈치 챌 수 있었지만, 실력 있는 감독이라면 두 번 정도로 압축해서 감정을 끌어올릴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게 안 되니 늘어지도록 반복하다가 진을 빼는 느낌. 마찬가지로 바다 소용돌이 장면도 짜증날 정도로 반복반복. 혹시 관객이 자기 의도를 못 알아먹을까봐 대단히 염려하고 노심초사하는 감독의 심리가 느껴짐. 복선으로 깔아야 작품성이 살아나는데, 일일이 보여주고 말로 하고 또 보여주고 또 말로 주저리주저리. 영화가 아니라 해설, 설명, 논거 제시를 하고 있음. 묘사는 없고 온통 서술만 있음. 게다가 저격수가 눈에 화살맞는 장면은 70년대 이소룡 영화 당산대형에서 악당이 나가 떨어지면서 벽에 구멍 뚤리는 장면 이래로 오랜만에 보는 어설픈 특수효과 처리.
그나마 쇠사슬 안 쓰고, 충파 전술로 처리한 것은 봐줄 만했음. 전투 장면도 기승전결은 난중일기에 스케치가 되어 있는 대로 큰 틀에서는 제대로 짠 듯하여 13 대 133 전투의 개연성을 높였고, 중간중간 괜찮은 장면도 일부 있었지만, 디테일이 허술하고 장면 사이의 연결이 부자연스러워서 점수를 다 까먹었다. 일본 전함들은 모두 어제 뽑은 신차마냥 기스 하나 없어서 리얼리티를 확 떨어트림. 다른 건 몰라도 배가 움직일 때 노라도 제대로 움직여 줘야 하지 않았을까. 어깨뼈에서 탈구된 팔마냥 노가 힘없이 흔들리면서 배가 이동하는 장면들이 영 눈에 거슬림. 이런 게 구현이 안 되니 가짜인 줄 아는데 진짜인 것처럼 봐줘야 하는 프로레슬링 쇼를 구경하는 심리가 되고 만다.
이 감독은 디테일을 포기하고 선이 굵게 나가는 스타일 같은데, 소설로 치면 김진명 삘이 확연히 느껴짐. 작품성이야 떨어지건 말건 소재의 힘으로 무대포로 밀고 나가서 대중성을 노리는 마케팅 전문 감독으로 보임. 하긴 누가 감독을 했다 하더라도 해상 전투 장면들의 디테일을 더 살렸을 것 같지도 않다. 자본력, 기술력, 연출력을 종합했을 때 아직 우리나라 영화제작 역량으로 명량대첩을 만족스럽게 담아내기엔 무리가 아닌가 싶다. 차라리 고즈넉 출판사에서 나온 박은우의 소설을 시나리오로 썼으면 완성도는 더 높게 나왔을지도 모르겠다. 영화 활처럼 감독의 특기인 긴박한 추격장면들을 활용할 수 있었을 테니까.
아무튼 초반 부분도 지루하다고들 하는데, 지루한 줄은 모르겠고 유치한 부분들만 잘 처리되었어도 8점 이상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유치한 장면들을 고집스레 집어넣을까? 아마 그래야 장사가 된다고 보기 때문일 것이다. 작품성을 떨어트리는 한이 있어도 수익을 떨어트릴 수는 없을 거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수준을 낮출수록 더 많은 관객이 든다는 것을 아는 감독이 자기보다 수준 낮은 더 많은 관객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자기의 수준을 더 떨어트리는 장사꾼 짓을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에서 감동받는 사람들과 아프니까 청춘이다를 읽고 감동받는 사람들 사이에는 낮은 수준에 적극 반응한다는 면에서 유사성이 있다. 베스트셀러가 되려면 수준을 낮출 필요가 있다는 게 마케팅의 법칙이다. 평소에 영화 잘 안보던 사람들까지 관객으로 끌어들여야 하는데, 이분들은 영화를 많이 보지 않아서 아직 신파를 감동으로 느낄 여유가 있고, 옥에티가 눈에 뜨이지 않을 정도로 쉽게 몰입이 되는 분들이라 영악하게 수준을 떨어트리면 천만 관객을 노릴 수 있게 된다. 반면 평론가들에게는 좋은 소리를 듣기 힘들다. 이 영화는 실미도 비슷하게 어설프게 만들었기 때문에 천만 관객을 동원하기에 충분한 자격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