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바이 카뮈 개정판

삶의 목적은 삶 자체인가 - 3

깊은생각 2013. 12. 9. 23:18

삶의 목적이 삶 자체라는 주장에 대해서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반론한다.


그런데 범신론까지도 생존은 그 자체가 자기 목적이라고 주책없이 떠벌리고 있다. 만일 우리의 생존이 세계의 최고 목적이라면, 우리가 조작한 것이든 신이 정한 것이든 가장 어리석은 목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의 생존이 일종의 미혹임에 틀림없는 것은 인간이란 욕구가 구체화된 존재로, 이 욕구 충족은 매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비록 어떤 욕구를 충족시켰다 하더라도 단지 고통 없는 상태에 이를 뿐, 동시에 권태에 사로잡히기 마련인데, 권태 자체는 아무 가치도 없고 오직 내면적으로 공허를 느끼게 할 뿐이다. 이 간단한 사실을 유의해 보다라도 인간의 생존이 미혹임을 잘 알 수 있다. 즉, 우리의 본성은 생존 요구에 따라 구체화되며 이 생존이 적극적인 가치와 참된 내용을 지니고 있다면 거기에 권태가 따를 리 없으며, 단지 살아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우리를 흡족하게 해주어야 한다.

 그런데 실제로는 어떤가? 우리가 자신의 삶을 즐기는 경우란 고된 노력을 하는 동안이나 순수한 지적 활동에 몰두하는 동안뿐이다.


삶 자체가 목적이라면 삶 자체가 가치가 있어야 하는데, 삶이란 본질적으로 고통과 권태일 뿐이므로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삶 '자체'를 삶의 '디폴트 값'이라고 볼 때, 이 초기값이 마이너스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는 목적이 될 수 없다는 논리다.


이 논리를 연장한다면, 이렇게 된다: 삶의 초기값은 마이너스다. 따라서 삶 자체는 가치가 없으며, 우리의 노력을 통해서 무언가 플러스적인 가치를 생산해야지만 그것이 목적이 될 수 있다. 가치가 있는 것. 삶이 그 자체로 가치가 있는 건 아니다. 예를 들어 식물인간의 삶. 물론 식물인간의 삶도 그를 사랑하는 가족에게는 가치가 있을 수 있지만 그 자신에게는 가치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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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삶의 목적이 삶 자체라는 주장을 반박하는 논리들을 몇 가지 살펴봤다. 그런데 삶의 목적이 삶 자체라는 주장은 전혀 틀린 것일까.


삶이 생산하는 가치가 삶의 목적이라고 할 때, 삶은 그 가치를 위한 수단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어쩌면 사실은 이것이 삶의 목적이 삶 자체라고 하는 사람이 주장하고자 하는 바일 수 있다. 즉 삶의 목적이 삶 자체라고 말하는 사람의 의도가 인간은 그저 살기만을 바란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라, 삶이 수단화되는 것을 막기 위한 전략적 오버로서 삶 자체가 목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일 수 있다. 예컨대, 게르만 민족의 영광을 위해 개인의 생명을 희생하라는 나치 독재 정권의 폭력적 강요 같은 것에 대한 반발에서처럼 어떤 외적 강제에 의해 삶이 파괴되고 수단화되는 것을 막기 위한 전략적 오버라고 선의로 해석해준다면? 삶보다 중요한 가치는 없다, 라고 할 때 모든 가치를 말하는 게 아니라 개인의 삶을 파괴하는 비인간적 가치만을 부각시키기 위한 과장법이라고 인정해준다면? 그렇다면 이것은 비트겐슈타인 식으로 말해서 단순한 언어의 오용 사례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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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논의에서 철학적 논쟁이 빠지는 오류의 일반적 패턴이 나타난다:


  한 사람이 어떤 부분적 주장을 보편적 주장인 것으로 표현한다.

  다른 사람이 이에 대해 사소한 반례를 찾아내 부정한다.

  그리고는 철학을 잘 한 거라고 착각한다.


소크라테스의 대화편에서 주로 구사하는 초식이 이런 것이다. 처음부터 모든 주장은 어떤 특수한 경우에만 참이라고 가정하면 될 문제인데, 주장하는 자나 반박하는 자나 그것을 모든 경우에 참인 것으로 전제하는 데서 문제가 발생한다.


누가 삶의 의미는 삶 자체다, 라는 주장을 했다 하자. 이에 대해 조국의 독립을 위해 자신의 삶을 버린 안중근의 예를 들어서 삶의 의미는 삶 자체다, 라는 주장을 반격하는 것이 타당한가? 그것을 통해 얻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가? 사유의 정교화?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것은 사유의 정교화라기보다는 소통의 실패가 아닐까?


주장하는 사람도, 반론하는 사람도 삶의 의미는 삶 자체다, 라는 주장이 전칭명제라는 무의식적, 암묵적 전제를 깔고 있다는 점이 오류의 시발점이다. 오류를 피하기 위해서는 삶의 의미는 삶 자체다, 라는 명제가 참인 바운더리를 지정해서 언급을 하면 된다. 바운더리를 벗어난 나머지에 대해서는 검증되지 않았다고 전제하면 된다. 아니면 듣는 사람 쪽에서 그렇게 알아들으면 된다. 이것만 지켜도 쓸데없는 논쟁은 안 할 수 있다.


그런데 철학적 훈련을 받은 사람들조차 정신을 집중하지 않으면 자신의 주장, 그리고 타인의 주장이 모든 경우에 참인 것이 당연하다는 착각에 쉽게 빠져드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어쩌면 니체가 말한 권력의지의 한 형태일 수도 있다. 일단 자신의 생각을 모든 시공간적 영역에 대해 참인 것으로 주장하는 일종의 영토 선언을 하고 보는 게 아닌가 싶다. 그렇게 깃발부터 꽂아 놓고 다른 주장들과의 경합 속에서 자신의 영역을 지키고 넓혀나가는 현상이 나타난다. 철학적 논쟁의 본질은 진리 탐색이란 명분을 내건 철학자들 사이의 일종의 영토 전쟁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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