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인생의 의미를 묻는가
인생의 의미라는 물음은 19세기 서양에서 처음 나온 개념이고, 20세기 실존주의에서 맹위를 떨쳤다. 그 이전에는 인생과 의미라는 개념을 조합하는 시도가 나타나지 않았다. 기껏 인생의 '목적'이라는 개념 정도가 쓰였을 뿐이다. 대린 맥마흔의 <<행복의 역사>>에서 보듯, 인간의 가치 추구의 역사는 대체로 행복이라는 범주의 바깥을 벗어나지 못한 채 이어져 온 셈이다. 그렇다면 이전과는 다른 현대적 생활 양식의 어떠한 측면이 행복이라는 가치만으로 충족되지 않는 욕구를 만들어냄으로써 이 삶의 의미라는 질문을 낳은 것이라 가정할 수 있다. 만일 그렇다면,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단순히 어떤 개념을 제시하는 방식으로써가 아니라, 현대적 생활 양식이 유발한 어떤 문제에 대한 적절한 대처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일 수 있다. 즉,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인생의 의미에 대한 어떤 정답을 제시함으로써가 아니라, 인생의 의미를 묻고 답을 찾는 과정에서 그 사람의 삶의 형태가 바뀌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일 수 있다.
이것은 본능과 욕망으로 인간 삶의 형태를 이끄는 방식에 비해서는 확실히 진일보한 인류 차원(또는 생명계 차원)의 집단지성의 낚시 미끼라고 볼 수 있다. 나의 가설은 인류의 사이즈가 수천만 또는 수억 명 단위를 넘어서 수십억 명 단위가 되기 위해서는, 인류의 일부가 욕망이나 의무에 기초한 가치를 넘어서 의미라는 상위 수준의 가치를 추구해야만 하는 어떤 필연성, 또는 선택 압력이 있다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수학의 발전 단계에서 일정 시점에 이르러 허수의 개념이 도입되어야 했듯, 인류의 발전 단계에서 수십억 명이 공존해야 하는 현대에 이르러 '삶의 의미'라는 개념이 도입되어야 했다는 것이다. 이 가설이 과학적으로 검증되지는 못하겠지만, <<총, 균, 쇠>> 정도의 문화인류학적 수준의 설명, 또는 노직이 시도했던 '철학적 설명' 정도는 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접근법은 삶의 의미를 개인의 내적 가치관으로만 바라보고 심리학적으로 탐구한 빅토르 프랑클의 미시적 관점과는 반대되는 거시적 접근법이라 할 수 있다.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은 현대라는 사회경제문화적 토대 위에서 발생한 어떤 '증상'이다. 이것을 비트겐슈타인 식으로 보자면 어떤 개인들에게 형이상학적 질병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인데, 이러한 철학적 질병을 유발하는 '병의 원인'을 규명함으로써 삶의 의미를 외부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삶의 의미가 개인의 내면적 사건으로 나타나는 것은 겉으로 드러난 현상일뿐이고, 본질적으로는 인류 공동체내지 생명공동체 차원의 상위구조에서 작동하는 메커니즘으로 봐야 한다.
나의 두번째 가설은 인생의 의미라는 질문에 정답으로 제시되는 후보들, 예컨대 돈과 성공과 행복과 신과 허무 등등이라는 지방분권적인 가치체계들이 인류의 역사가 수십억 단위의 사이즈로 통합되어가는 지구 공동체 속에서 '의미'라는 메타 범주 아래로 통합되는 것에 어떤 논리적 필연성이 있다는 것이다. 크게 보면 서양의 중세에 삶의 의미라는 질문이 나타나지 않은 것은 '신' 하나로 모든 가치에 대한 논란이 통일될 수 있었기 때문인 건데, 과학의 발달로 신의 입지가 축소되고 종교적 권위가 통하지 않게 되자 한편으로는 가치의 세속화(돈, 성공, 행복, 쾌락)가, 다른 한편으로는 허무주의(우연히 발생한 우주에는 필연적으로 살아야 할 이유는 없다는 식)가 나타났고, 의미는 특히 이 허무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타난 것이라는 것. 따라서 삶의 의미라는 개념은 현대적 질병인 허무주의를 극복하는 동시에 과거로부터 이어져온 전통적 가치와 현대 사회에서 새롭게 나타나고 있는 다양한 가치들을 내부에서 조화롭게 통합할 수 있는 어떤 메타 범주로서 요청되었다는 것이다. 만일 이 가설이 옳다면 삶의 의미는 이전에 종교가 하던 역할의 일부를 대체한 준종교적인 개념이 될 수 있다. 즉 현대 과학과 모순되지 않는 종교적 태도로서의 '삶의 의미'에 대한 철학적 명상이 가능할 수 있다.
거시적 관점에서 보자면, 삶의 의미의 기본 단위는 개인이 아니다. Meaning of Life의 원래 의미를 따라, 의미의 주체는 개체가 아니라 생명계 전체일 수 있다. 인간 삶의 의미는 박테리아 코스모스 전체의 생존에 뿌리를 두고 있고, 개인적 삶의 의미는 인류 전체의 생존을 위한 가치의 생산과정에서 분업에 참여하는 방식으로 얻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