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주장에 대해
정체성은 시간의 경과 속에서 동일 패턴이 유지되는 것이다. 우리의 일반적 인식은 대상과 자아에 대해서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동일성이 어느 정도 지속된다고 본다. 즉 정체성이 유지된다고 본다. 이러한 인식에 대해 위빠사나 명상가나 흄주의자는 순간순간 변화하는 감각적 지각만이 있을 뿐, 시간의 흐름 속에서 동일성을 유지하는 실체는 없다고 본다. 영화에 비유하자면 1초에 30개의 화면이 명멸하는 것이 실재인데, 이것을 보는 사람은 깜박깜박 명멸하는 화면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대상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연속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고정된 실체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관이 만들어낸 망상이라는 것이다.
위빠사나 명상가류의 주장을 일단 받아들여 보자. 이 세상이 실제로는 찰나생 찰나멸하고 있는데, 우리가 어떤 이유에서건(아마 진화론적 생존 상의 이유겠지만) 이를 자기동일성을 가진 실체로 인식하고 있을 뿐이라고 하자. 그런데 찰나찰나 생멸하는 세계라고 해서 반드시 우리 우주처럼 자기동일성이 유지되는 것처럼 보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어떠한 연속적 흐름이나 맥락 없이 불규칙적 혹은 무작위적으로 깜박깜박 명멸하는 우주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정체성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우리 우주를 찰나생찰나멸(1)이라 하고, 정체성을 찾으려 해도 찾기 힘든 무규칙 우주를 찰나생찰나멸(2)라고 하자.
이 두 우주는 분명히 차이가 있다. 우리 우주에서는 분명히 무언가가 지속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우리의 인식이 정체성이 없는 것에서 정체성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정체성에 해당하는 뭔가가 객관적으로 실재하고 있다. 노직의 용어로 말하자만
'가장 가까운 계승자(the closest continuer)'에 해당하는 유사한 패턴이 객관적으로 실재한다. 실체란 전혀 없다고 하려면, 즉 완전한
찰나생찰나멸이라고 하려면 생멸하는 감각적 지각의 맥락의 연결이 전혀 안돼야 한다.
하지만 우리 우주에서는 눈앞의 대상들, 예컨대 책을 볼 때 찰나마다 변하지 않고 시간의 흐름에 저항하여 책이라는 형태를 유지하는 것으로 나타난다(물론 원자 수준에서는 주위와 입자가 교환되는 찰나생찰나멸일 수도 있다. 하지만 가시 수준에서도 찰나찰나 생멸하는 우주가 논리적으로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우주에서는 최소한 가시세계에서는 찰나생찰나멸이 아닌 시간에 저항하는 정체성이 인식되고 있다.) 위빠사나 수행자들이나 흄이 주장하는 감각적 지각만 실재한다는 것은 최소한 우리 우주의 가시세계에서는 과장법이라고 본다. 존재들이 일정 시간 지속한다는 것이 착각이라고 볼 수만은 없다. 적어도 무작위 우주에 비교해서는 정체성이라 불릴 수 있는 현상이 상대적으로 더 강하게 존재하고 있다.
예를 들어 무작위 우주에서는 어느 한 시점에 내 눈앞에 어떤 사람이 있다고 했을 때, 이 사람이 다음 순간에도 지속적으로 보여서는 안되고, 0.1초 후에는 머리와 몸통이 해체되었다가 0.2초 후에는 머리는 안드로메다로 가고, 몸통은 토성으로 가고 손발은 원자 수준으로 분해되고..(물론 안드로메다나 토성도 0.1초 후에는 다른 것으로 바뀌어 있을 것이다)하는 식으로 순간순간 불규칙적으로 변할 것이다. 이 경우에는 시간의 지속 속에 동일 패턴이 전혀 나타나지 않으므로 실체가 없다는 말이 설득력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우주에서는 사람들이 실체가 존재한다고 착각할 여지마저 없게 된다. 누구나 흄이 말하는 인상의 다발만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아니, 인상의 다발을 인식할 주체조차 존재할 수 없게 된다. 주체 자체가 시간의 흐름에 저항하여 정체성을 유지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하지만 지금처럼 0.1초가 아니라 몇 시간, 며칠 또는 수백년 후에도 동일한 것으로 인식되는 대상들이 존재하는 우주에서 고정된 실체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기발한 아이디어 하나 떠올렸다고 촐싹거리는 것으로밖에 안 보인다.
정체성을 완전히 부정하려면 가시세계에서도 정체성이 인식되지 않아야 한다. 가시세계에서는 인식되는데, 미시세계에서는 인식되지 않는다고 해서 가시세계의 정체성이 허상이라고 보는 것은 맞는 논리인가? 거시세계의 대상도 매순간마다 미시적으로는 변하니까 실체가 없다? 매순간마다 변할 때, 실체가 없는 것처럼 무작위적으로 변할 수도 있는데, 어쩐 일인지 우리 우주에서는 규칙적으로 변하고 있어서 실체가 있는 것으로 보이고 있는 것이다. 실체가 실제로 없으려면 매초마다 단지 변하는 것만으로는 안되며, 연속성 없이 무작위적으로 변해야 한다. 패턴이 나타난다는 것은 최소한 실체라고 부를 '건덕지'는 객관적으로 실재한다고 봐야하지 않을까.
PS) 어떤 별빛이 100억 광년의 시공간을 뚫고 우주 저편에서 지구에 도착한다고 했을 때, 이 광자는 불변의 상태로 자기동일성을 유지한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구성요소를 마치 테세우스의 배처럼 갈아끼우면서 자기동일성을 유지한 것인가. 아래 동영상을 보면 거시세계의 물체도 주변으로부터 단절시켜 절대영도에 가까운 조건 속에 놓이면 미시세계의 소립자처럼 동시에 여러군데 존재하는 양자중첩 현상이 나타난다고 한다. 정체성이란 헤라클레이토스적 세계를 파르메니데스적으로 인식하려는, 주체와 대상 간의 인식론적 타협의 산물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