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법칙

<<종교본능>> 역자 후기 초고

깊은생각 2012. 2. 29. 22:54

비트겐슈타인의 어투를 따라 말하자면, 신비한 것은 신이 존재하는가의 여부가 아니라 왜 우리가 신의 존재에 대한 의문을 끊임없이 제기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또한 진짜 미스터리는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이 아니라 도대체 왜 우리가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을 그토록 끈질기게 던지고 있는가 하는 점일 것이다.

이에 대한 제시 베링의 대답은 전혀 신비적이지 않다. 그것은 바로 "마음이론(theory of mind)” 때문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우리가 신이나 영혼, 내세와 같은 종교적 관념을 가지게 된 것이 기독교 등의 특정 종교라는 사회문화적 바이러스에 감염되었기 때문이라는 (리처드 도킨스 식) 논리에 동의하지 않는다. 사회문화적 변수가 작용하기에 앞서, 우리의 뇌가 생물학적 수준에서 신의 존재, 영혼 불멸, 내세 및 인생의 의미 등에 대한 생득적 사유 형식을 탑재하고 있다는 것이다(따라서 종교를 박멸하는 일은 과학교육으로는 불가능하며, 오직 뇌수술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리고 이러한 사유 형식은 우리의 인지 체계가 진화해오면서 획득하게 된 마음이론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진화적으로 자연선택된 우리의 두뇌는 인과적 설명에 입각한 진화론보다는 목적론적 설명에 입각한 창조론을 선호하도록 자연선택되어 있다는 것이 저자의 지적이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말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마음이론이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타인에게도 나와 같이 생각하고 느끼고 의도하는 능력이 있다고 추론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이게 당연한 것이지 뭐가 대단한 능력이라는 것일까? 제시 베링은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사건들이 마음이론이 없다면 어떻게 체험될지 악몽 같은 사례를 통해 보여준다. 어느 식당에 앉아 있는 한 가족의 평범한 저녁 식사를 관찰해보자. 남편과 아내와 어린 형제가 있다. 그 가족의 막내가 형이 괴롭히자 울음을 터뜨린다. 하지만 마음이론이 없을 때 우리에게 보이는 것은 단란한 가족의 저녁식사가 아니라 옷들을 채우고 있고 의자에서 늘어져 있는 피부 자루이다. 그 피부 자루들의 꼭대기에는 쉬지 않고 움직이는 작고 검은 점들이 있고, 그 아래에서 구멍 하나가 더러 소음을 낸다. 그 자루들은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움직이고, 때때로 그것들 중 하나가 우리를 건드린다. 구멍들은 모양이 변하고, 때때로 두 점으로부터 짭조름한 액체가 흘러나온다.”

사실 이 사례는 마음이론보다는 객관적 대상의 실재를 부정하고 감각으로 지각된 것만 진짜 존재한다는 버클리 류 주관적 관념론의 적용 사례에 가까워 보인다. 마음이론이 없다면 일단 다른 사람은 겉보기에는 생각이 있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실제로는 무뇌 좀비인 것처럼 보일 것이다(데카르트가 동물을 정신 능력이 없는 자동기계로 간주했을 때 그는 마음이론을 작동시키지 못했던 것같다. 반면 침팬지에게 사람과 동일한 인격이 있는 것처럼 여겼던 제인 구달은 마음이론을 과다 적용했던 것이 아닐까). 자폐아처럼 주변에 누가 있든지 신경 쓰지 않고 혼자 중얼거릴 것이다. 우리가 고양이 앞에서 거리낌 없이 옷을 갈아 입듯이, 사람들 앞에서도 부끄럼 없이 방귀뀌고 똥누고 섹스를 할 수도 있다.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타인도 나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가정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마음이론에 관한 책이다. 단지 마음이론 하나만을 전제하고 여기에 진화론을 적용했을 뿐인데, 거기로부터 신이 나오고, 영혼이 나오고, 불멸이 나오고, 내세가 나오고, 불멸이 나오고, 운명이 나오고, 인생의 목적과 의미가 나온다. 게다가 도덕과 윤리까지도 나온다. 가히 인간판 만물의 이론이다.

재미있는 것은 침팬지에게는 마음이론이 없거나 아주 미약하다는 주장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론이 분분하지만 저자는 인간만이 진정한 의미의 마음이론을 가진다고 보고 있다. 이에 따라 인간을 정의하는 새로운 기준이 나온다. 인간은 더 이상 도구적 존재도 아니고 언어적 동물도 아니다. 제인 구달과 그녀의 친구들에 의해 침팬지도 도구를 사용하고 인간의 언어를 배울 수 있음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마음이론 뿐이다. 오직 인간만이 타자의 마음을 추론하는 존재라는 것. 심지어 마음이 없는 곳에서도 말이다. 그 결과 신이 생겨나고 영혼이 생겨나고 내세가 생겨나고 종교가 생겨날 수 있었다.

마음이론이 밝힌 신의 정체는 적응적 환상(adoptive delusion)이다. 거의 모든 문화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신 관념은 모든 것을 지켜보고 판단하고 처벌하는 존재로서의 신이다. 이러한 신 관념을 마음이론의 의도하지 않은 부산물로 얻게 된 우리의 선조들은 동물적 유혹의 순간에 쾌락적, 충동적, 이기적 행동을 자제하게 됨으로써 그렇지 못한 개체들보다 사회적 추방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되었고, 그 결과 진화적으로 자연선택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도 같은 결론을 도출할 수 있겠다. 인생의 의미라는 개념을 채택한 개체들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보다 자연선택될 가능성이 높을 수 있을 것이라고. 어떤 측면에서 그럴까.

니체는 왜 사는지 아는 사람(, 인생의 의미를 깨달은 사람)은 어떠한 역경도 이겨낼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이 말을 몸으로 증명한 로고테라피의 창시자 빅토르 프랑클은 삶의 의미를 간직함으로써 자신이 아우슈비츠의 지옥으로부터 생존할 수 있었다고 증언한 바 있다. 어쩌면 이것이 인생의 의미라는 개념을 채택한 개체의 진화적 생존가능성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일 수 있겠다.

제시 베링에 따르면 인생의 의미는 신 개념과 더불어 인간의 마음이론이 범주오류를 일으킴으로써 실제 마음이 없는 곳까지 확대 적용되어 발생하게 된, 하지만 진화적 적응에는 도움이 된 환상일 뿐이다. 그런데 신 개념은 앞으로는 진화적 적응에 별로 도움이 안 될 것 같다. 기술의 발달로 전세계가 감시카메라, 위성사진, 인터넷 정보망으로 뒤덮이고 CSI 식으로 과학수사가 벌어지는 세상에서는 굳이 만인을 지켜보고, 판단하고, 처벌하는 신이 필요치 않다는 것. 신 없이 인간의 기술만으로 지켜보고, 판단하고, 처벌하는 데 아무 문제도 없다는 것. 따라서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발명할 필요가 있다는 볼테르의 말은 시의성을 상실한 시대착오적인 주장이 되어 버렸다. 그렇다면 인생의 의미는? 인생의 의미는 아직 나타난 지 얼마 안 되는 신생 개념이므로 앞으로도 상당 기간 적응적 환상으로서 크게 기여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