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바이 카뮈 개정판

카뮈와 우주의 무관심

깊은생각 2015. 3. 30. 23:07

우주가 인간의 의미 요구에 대해 무관심하고 냉담하다는 카뮈의 주장에 대해.


1. 우주가 우리에게 냉담하다고? 노자가 2500년 전에 벌써 깨달은 걸 가지고 이제 와서 새삼 무슨 충격이라도 받았다는 말인지...

네가 바라는 게 도대체 무엇인가? 너의 부모와 자식, 친구들은 너에게 냉담하지 않다.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무엇을 더 바라는가? 왜 너의 가족과 친척과 친구 뿐만 아니라 우주까지 통째로 나서서 너 따위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말인가.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과욕이거나 어리광이 아닌가. 너는 지나가는 개가 너에게 관심을 갖지 않고 냉담한 것에 대해서도 충격을 받는가? 지나가는 개의 무관심에 대해 충격을 받지 않는다면, 저 광대한 우주의 무관심에 충격을 받을 이유는 무엇인가.


2. 너의 가족, 친구, 연인은 너에게 무관심하지 않다. 그런데 실은 너의 가족, 친구, 연인도 우주의 일부다.
따라서 우주가 인간의 의미 요구에 대해 무관심하고 냉담하다는 주장은 옳지 않다.

최소한 우주의 일부는 너에게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있다.

문제는 우주 전체가 너에게 관심을 가져야만 만족할 수 있다는 너의 과욕일 뿐이다.


3. 카뮈의 주장은 가족, 친구, 연인 따위의 사소한 존재들의 관심은 대단하지 않다는 것.

기독교의 신처럼 우주 전체를 대표하는 전지전능한 인격체의 관심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절대적인 것, 궁극적인 것, 무한한 것에 대한 욕구이다.

의미에 대한 요구는 마치 자본의 무한증식처럼 계속해서 더 큰 것을 요구한다.

노직이 말했듯히 무한한 자기초월이다.

의미는 궁극적으로 무한을 지향한다. 일종의 질병이다.


4. 물질의 궁극적 상태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절망하고 좌절하고 자살까지 고민하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삶의 궁극적 의미와 관련해서는 절망하고 좌절하고 자살까지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은 삶의 의미를 추구할 때의 마음가짐이 과학적인 호기심을 추구할 때의 마음가짐과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마치 엄마를 찾는 아이의 마음과 같다. 절대자와 떨어져있음을 견디지 못하는 분리불안 같은 것.

즉, 정신적 미성숙의 징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