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의미
<<파스칼의 질문>>을 번역하다가 느낀 건, 종교에 사로잡히면 천재고 뭐고 말이 통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파스칼 팡세의 핵심은 불멸과 구원이다. 불멸하지 못한다면 인생은 비참한 것이며, 불멸하기 위해선 구원받아야 하는데, 구원을 받으려면 기독교 신을 만나야 한다는 논리다. 그런데 논리와 증거로는 기독교 신을 만날 수 없으며 심성(heart)로만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신을 만나면 구원되는 것이 맞는가?
구원의 가장 일반적인 이미지는 구덩이에 빠진 사람을 밧줄로 끌어올려주는 것이다. 인간이 비참함 속에 빠져있는데 신이 비참함에서 끌어올려서 자신의 우편으로 앉혀주면 그것이 구원이라고 하는 기독교도 밧줄과 구덩이의 변주로 보인다.
다른 한편으로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 구원일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삶의 의미는 더 넓은 가치의 연결망 속으로 자기를 초월하는 과정을 말한다(세부 논증은 <<굿바이 카뮈>>에서 전개했으니 생략). 의미찾기는 더 좁은 세계와의 만남이 아니라 더 넓은 세계와의 만남을 의미한다. 더 넓은 세계와의 만남이 구원이다. 나는 우리를 만나는 것이고, 우리는 전체를 만나는 것이 구원이다. 구덩이는 좁은 세계고 바깥으로 나오는 것이 더 넓은 세계라고 보면, 여기서도 밧줄과 구덩이의 비유가 통한다.
그런데 더 넓은 세계도 사실은 더더 넓은 세계의 관점에서는 구덩이와 같다. 작은 감옥에서 큰 감옥으로 옮긴 것이므로, 일시적으로 해방감을 느끼지만 장기적으로는 다시 구덩이에 갇힌 것과 같다. 따라서 한번 구원으로 지복천년을 맞이하기는 어렵다. 의미 찾기는 무한한 자기초월로 이어지는 수밖에 없다. 물론 개인의 삶은 짧기 때문에 서너번의 자기초월만으로 인생은 끝나버린다. 인류 단위로 보면 수백만년의 초월이 가능하고, 생명 단위로 보면 수십억년 단위의 초월이 가능하며, 우주 단위로 보면 수백억년 단위의 초월이 가능하다. 우주가 영원히 존속하기 위해서 의식을 가진 생명을 진화시킨 것이라는 가설에 따르면, 무한한 의미추구만이 영원한 구원이다. 신의 우편에 앉으면 다음엔 무엇을 하는가? 영원한 행복? 그것은 구원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