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생각

인생의 머나먼 의미에 대해

깊은생각 2013. 2. 4. 20:30

우리가 인생의 의미를 쉽게 찾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당대에 완결되는 것이 아닐 수 있는 삶의 의미를 너무 가까운 곳에서만 찾으려 하기 때문일 수 있다. 너무 작은 의미에 사로잡혀서 정말로 큰 의미에는 무관심하기 때문일 수 있다.

예컨대 당신 인생의 의미는 당신의 10만대 후손 중 하나가 외계인의 침략에 맞서 지구생명체를 구하는 영웅적 역할을 수행할 것이라는 사실에 있다고 할 때, 당신은 이에 대해 쉽게 납득할 수 있을까? 그것을 당신 자신의 삶의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나는 별볼일 없는 인생을 살다가 무의미하게 죽었는데, 나의 100만대 후손 중 하나가 우연히 돌연변이를 일으켜 인류를 능가하는 초지성적 능력을 획득한 새로운 종의 시조가 되어 이 우주의 멸망을 막을 수 있는 만물의 법칙을 발견할 신문명을 탄생시키는 계기가 된다면, 그것이 시간을 거슬러 와서 무의미했던 내 인생에 다시 의미가 생기도록 만들 수 있는 것일까?

아마도 이렇게 우주적 스케일로 머나먼 인생의 의미는 당신과 나에게는 별 의미가 없는 것으로 여겨질 가능성이 클 것이다. 관계의 거리가 멀어질수록 우리가 느끼는 의미의 농도는 옅어질 수밖에 없다. 내 아들이, 내 손자가 지구를 구한다면 나의 고통스런 삶에서도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겠지만, 내 증손자나 고손자가 그렇다면 이건 좀 생각해볼 문제가 될 것이다. 고손자 이후부터는 "나 죽은 다음에 홍수가 나든 말든" 하는 심정으로 기울 가능성이 클 것이다. 나의 10대손이 지구를 구하는 것보다는 당장 이번주 로또에 당첨되는 것이 나에겐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하지만 신(또는 우주)의 입장에서는 거꾸로 특정 개인의 소소한 행복보다는 우주적 스케일의 기획이 성사되는 것이 훨씬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벌레의 관점과 나의 관점이 다르듯, 나의 관점과 신의 관점도 다를 것이다. 그래서 신은 우리에게 섹스의 즐거움 같은 소소한 것들을 선사한 것일지도 모른다. 인생의 머나먼 의미, 우주적 스케일의 삶의 의미를 자신의 것으로 느끼지 못하는 불쌍한 중생들에게 현실적인 주관적 만족이나 먹고 떨어지라고 말이다. 그리하여 주관적 욕구 충족을 추구하는 근시안적인 중생들이 '의도하지 않게' 우주적 스케일의 삶의 의미에도 참여하고 기여할 수 있도록 각본을 짜놓은 것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미시세계로부터 우주적 스케일까지 의미의 그물망으로 촘촘히 엮어놓아 생명체 각자가 자신의 깜냥에 맞는 가치를 생산하고 그로부터 의미를 얻는 방식으로 전우주가 조화롭게 운행하고 있는 것이 삶의 의미의 궁극적 진상일 수 있다. 이것은 아담 스미스가 말한 보이지 않는 손의 의미론적 버전인 것처럼 보인다.

이 모든 의미의 그물망을 관조하는 사람은 자신의 행불행에 매몰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마치 깨달은 사람처럼, 달관한 사람처럼 당대에 완결되지 않는 의미의 관계망을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사람은 어쩌면 신의 관점에 가까운 사람일 수 있다(스피노자가 말한 영원의 상 아래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사람). 물론 이 모든 것을 관조하면서도 현실의 행불행에 여전히 매몰되는 삶도 가능할 것이다. 어쩌면 이론 따로 실천 따로가 대세인 점을 감안할 때 신의 관점에 가까이 도달한다 하더라도 여전히 현세의 행불행에 매달리는 경우가 더 많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