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생각

작품으로서의 세계와 총체성

깊은생각 2012. 12. 1. 04:31

세계가 사물들의 총체냐(라이프니쯔), 사실들의 총체냐(비트겐슈타인), 집합들의 총체냐(프레게), 관념들의 총체냐(버클리), 정보들의 총체냐 등등 철학자들마다 해석이 분분하다. 마치 시를 놓고 누구는 이렇게 읽고, 누구는 저렇게 읽는 것처럼, 마치 감독이 영화를 내놓고는 해석은 관객들의 몫이다, 라고 말하는 것처럼, 이 세계는 하나의 예술작품처럼 던져져서 해석을 기다리고 있는 듯하다.

거꾸로 보면 작가가 한마디를 하려 할 때 불가피하게(또는 의도하지 않게) 여러가지가 딸려 나올 수밖에 없는 구조적 측면이 있다. <<파주>>라는 영화의 박찬옥 감독과 이동진 씨가 인터뷰한 내용을 읽다보면, 감독은 평론가가 해석하는 의미에 대해 생각조차 해보지 않은 것처럼 반응하는데, 이러한 현상은 매우 일반적일뿐 아니라 심지어 불가피한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스스로는 구원에 대해 말하고자 한 것으로 보이는 김기덕 감독의 <나쁜 남자> 같은 영화들을 보고 페미니스트 평론가들은 오직 여성에 대한 폭력만을 읽어내는 것처럼. 이 같은 해석의 다양성은 예술만의 특성이 아니라, 이 세계 자체의 본질적 특성이라고 봐야할 것 같다. 즉 비트겐슈타인의 '오리-토끼' 현상은 특수한 것이 아니라 이 세계의 일반적인 현상일 수 있다. 예를 들어 박정희에 대해 보수와 진보의 인식이 상이한 것처럼.

따라서 하나의 일관적이며 일원적인 이론 체계는 내적인 정합성 면에서 '아름답게' 느껴지지만 대부분의 경우 세계의 총체성을 일면화하는 환원론으로 귀결되고 만다는 점에서 편협한 정파주의로 흐르게 되는 것 같다. 총체성의 철학은 가설의 논리적 다양성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이질적인 것들의 조화로운 통합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국면-보기(aspect-seeing)에서 대상의 일면적인 모습을 전면적인 모습으로 우기는 '정치적' 태도에서 벗어나야 한다. 부분적인 것을 진리로 주장하는 사람은 이 세계의 구조적 필연성에 의해 필연적으로 거짓을 주장하는 것이 된다. 대부분의 거짓은 완전한 허위 사실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부분적인 것을 전체라고 우기는 형태로 나타난다. 따라서 '정치적으로 올바른' 태도는 없으며, 어떤 태도가 정치적인 한 그것은 부분적 한계에 갇혀 있는 것이므로 스스로 전면적 진리 주장을 하는 순간 필연적으로 거짓이 되고 만다.

따라서 특히 예술을 놓고 일면적인 해석을 가지고 진리 주장을 하는 것처럼 황당한 모습은 없을 것이다. 앞서 말한 김기덕의 <<나쁜 남자>>를 두고 페미니스트 평론가들과 김기덕 감독이 내가 옳으니, 네가 옳으니 논쟁을 한다면, 그것은 '비트겐슈타인의 오리-토끼'를 놓고 오리파와 토끼파로 나뉘어 싸우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 된다. 그것은 어떤 것이 누군가에서 무엇으로 보이느냐의 문제, 즉 '국면-보기'의 문제일 뿐이다.

그러면 왜 모두가 부분적인 국면에 붙들려서 자신이 쥐고 있는 파편조각이 세상의 전부인 양 우기는 데 심취해 있는 것일까. 왜 페미니스트들은 김기덕의 <<나쁜 남자>>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만을 보고, 김기덕은 구원만을 내세우면서 그것을 여성에 대한 왜곡된 인식에 대해서는 극구 부정하는 것일까? 등등....그것은 마치 생물의 종 다양성 패턴과 유사한 패턴을 보이는 것 같다. 어떤 생태계가 환경의 변화 속에서 진화적 적응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내적인 다양성을 높여야 하는 것처럼, 어떤 대상에 대해 개별적 의견들을 갈라놓고 싸움을 붙여서 그 결과로 나타나는 갈등의 균형으로서의 전체 의견이 이 세계가 자신의 존속을 위해 필요로 하는 '결과적인 총체적 인식'일 수 있다. 즉 '이질적인 것들의 조화로운 균형'이라는 총체성의 원칙이 개별적인 것들의 오류들간의 힘겨루기를 통해서만 관철되는 것이 이 세계의 질서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개인들은 총체적 세계가 감독하는 영화 속에서 부분적인 것을 전체라고 믿고 우기는 '정치적 바보'의 역할을 맡고 있는 엑스트라가 된다. 서로 다른 화음을 내는 바보들의 합창을 통해 현명한 집단지성으로 끌어내는 것, 이것이 헤겔식으로 표현을 쓰자면 총체의 간지(奸智)다.(이성의 간지라고 부르는 것은 약간 부적절하다. 계몽주의 시대에 과대평가된 이성 개념과 달리, 오늘날 이성은 정신 전체를 대표하기에는 부분적 개념이며, 정신은 세계 전체를 대표하기에는 부분적 개념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