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적 오류의 한 유형
철학적 논의에서 자주 발견되는 유형의 오류 중 하나는 부분의 전체화다. 강신주의 노자철학 해석을 예로 들어보자. 강신주는 노자철학을 황노학, 즉 지배자의 용인술로 보는 듯하다. OK다. 여기까지는 문제 없다. 그런 해석을 하는 사람은 강신주 말고도 많다. 그런데 여기서 나아가 노자철학을 무정부주의자의 이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을 비판하고 부정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당신의 해석은 틀렸고 나의 해석이 옳다고 주장한다. 이 때 오류가 발생한다. 노자철학이 황노학이라면, 그것은 무정부주의는 아니어야 한다는 이 '상투적인' 생각이 오류를 불러온다. 예를 들면 비트겐슈타인의 '오리-토끼'를 놓고 이것은 오리이며, 토끼는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애초부터 하나를 선택하고 다른 것들을 배격하려는 목적으로 '철학' 논문을 쓰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철학 논문은 그래야 한다고 장려된다. 실체가 다면적이라는 전제는 무시된다. 다면적 실체를 일면화하려 한다. 하나의 해석에 대해 좁은 수준의 논리적 일관성을 얻기 위해서 총체성, 즉 다양성의 조화로운 통합이라는 더 큰 가치를 포기하는 것이다. 얼마나 비철학적인가.
어떤 것이 '동시에' 오리이면서 토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동시에 오리-토끼'이다'. 존재 자체는 동시에 다면적인데, 인식은 동시에 다면적이지 않다. 인식이 시간에 대해 일면적(1차원적이기) 때문이다. 인식이 시간에 대해 다면적(2차원적 이상)이라면 우리는 인식의 시간적 일면성에 근거하여 존재의 다면성을 부정하는 강신주 식(?) 오류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일면적 선택에는 감정이 개입된다는 것이다. 사람의 판단을 일면적으로 끌고가려는 본능적 수준의 강력한 힘이 있다. 나의 일면적 판단에 반대되는 다른 부분적 판단들에 대해 부정적 감정이 형성된다. 자기하고 다른 것에 대한 부정적 감정은 생물학적 자기 보존의 욕구와 연관성이 있는 듯하다. 이는 진화론적 해석으로 이어질 것이다.
하지만 자기를 작게만 통합할 수 있는 사람들은 더 큰 가치를 생산할 수 없다. 자신의 힘과 기술로 더 큰 자기를 통합할 수 없을 때 부분적 자아로 움추러들면서 외부와의 관계망을 끊고 다면성을 배척한다. 이로써 더 큰 가치의 생산은 실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