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떠한 곳에도 이르지 못하는, 그저 저자가 읽었던 책들의 주변을 맴도는, 평범한 사유를 글솜씨로 그럴 듯하게 포장한 이런 책들이 자꾸 나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약간의 이론과 약간의 현실과 약간의 감상과 약간의 비판을 그럴 듯한 글재주로 뒤섞어서 팔릴 만한 제목의 말랑말랑한 책으로 요리해냈다.
책을 손에 들자마자 받은 느낌은 예쁘다. 무겁다는 느낌이었다. 컴팩트한 사이즈, 세련된 디자인, 촘촘한 문체와 전개...분명히 요즈음 나온 다른 책들에 비추어 미학적 완성도가 높다. 하지만 사회학 책이 미학을 기준으로 평가되어서야 본말이 뒤바뀐 셈일 것이다.
책을 펼치자마자 벤야민이 어떻고, 베버가 어떻고, 보드리야르가 어떻고, 왜 이리 유명인사 이름주어섬기기가 심한가? 대학초년생들을 위한 책소개 책일까? 어지간한 인문서 독자라면 다 읽었을 만한 책들을 소개하고 있다. 뭐라고 딱히 나쁜 책은 아니지만 나로서는 별로 건질 만한 알맹이가 없다. 다른 사람이 한 얘기를 저자의 문학적 필치로 리라이팅한 정도다.
읽다보니 어떤 표현들이 거슬린다. 영화를 소비한다, 남성을 소환한다. 이런 상투적 한자투...소비는 써서 없앤다는 의미인데, 영화를 본다고
해서 그것을 써서 없애는 것은 아니다. 바람직하지 못한 사용을 '소비'라는 말로 쓰는 버릇을 가지는 사람들이 종종 보인다. 주로 자본주의 상품화 운운하는 사람들이 쓰는 은어인데, 서로 베껴서 이제는 베끼는 건지도 모르고 쓰는 상투어가 되어 버렸다. '호명한다'는 표현도 비슷한 유파의 사람들 사이에서 과잉 사용되고 있다.
이 책은 드레이퍼스의 <<모든 것은 빛난다>>와 읽는 맛이 비슷하다. 논지에 솜씨 있게 말장식을 붙였는데, 그것이 필요 이상으로 과하다. 정확히 말하면 논지과 말장식 사이의 조합 비율이 적절하지 않다. 조미료가 과한 음식을 먹는 맛이다. "장식은 범죄다." 특히 그것이 알맹이의 빈약함을 가릴 때는.
더욱이 문제는 장식이 비용으로 전가된다는 점이다. 이 책의 사이즈는 140*210mm로 일반 판형인 152*225mm보다 작다. 행 길이는 95mm이고, 22행에 불과하다. (보통은 100mm, 24행이다) 아래 여백이 무려 40mm다. 여기에 컬러 일러스트 몇 장을 삽입했다. 일반 판형으로 했으면 260페이지로 만들 수 있는 책을 가벼운 에세이 형식의 디자인을 채용하여 308쪽으로 만들었다.(따라서 30-40쪽 가까이 종이비가 추가로 든다. 게다가 100g짜리 두꺼운 종이를 썼는지 무겁기까지 하다.) 그래놓고 가격은 묵직한 인문사회과학서 값인 16,800원이다. 책의 지식가치로만 보았을 때 이 가격은 분명 과하다. 책의 예상 판매량을 고려했을 때에는 더더욱 그러하다. 14500원으로 했어도 충분했을 터인데, 장식값 명목으로 2천 원 이상이 더 붙었다. 아이스커피에 얼음 몇조각 넣고 500원 더 받는 것과 마찬가지 상술이다. 더욱 씁쓸한 것은 표지는 마치 환경 문제에 의식있는 저자임을 암시하는 듯 재생용지인 것처럼 보이는 종이를 표지로 썼다. 어쩐지 보보스적인 느낌을 주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