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식 교수가 중앙Sunday에 기고한 칼럼 '삶은 의미 있어야 하는가?'의 앞부분을 보자.

비트겐슈타인은 그래서 '삶의 의미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자체가 논리적으로 무의미하다고 주장했다. 조금 더 생각해 보자. “x의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한마디로 ‘정해진 범위 y 안에서 x의 용도 또는 x가 y에게 줄 수 있는 결과들의 합집합’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벽과 못’이라는 범위 안에서 ‘망치’의 의미는 아마도 무언가를 두들겨 벽에 박을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결국 무언가의 의미란 다른 무언가와의 관계를 나타낸다. 그럼 우리 인생에서 가장 큰 범위는 무엇일까? 그건 바로 삶 그 자체다. 그렇다면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라고 질문하는 순간 우리는 단지 “삶과 삶의 관계”라는 동일한 단어를 반복하는 난센스를 말할 뿐이다.

김대식 교수가 삶의 의미를 부정하는 논리의 핵심은, 의미라는 단어의 의미는 자신의 바깥에 있는 어떤 것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인데, 삶의 의미는 삶의 바깥으로 빠져나갈 수가 없기 때문에 "삶의 의미는 삶 자체다"라는 동어반복의 넌넨스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럴 듯하다. 과연 그럴까?

먼저 김 교수가 삶의 의미가 다의적이라는 것을 잊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도록 하겠다. 김 교수가 말하는 것은 가장 넓은 의미의 '인생의 의미'이다. 즉 인류 전체의 삶 일반에 대한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 차원의 삶의 의미에 한정되는 말이다. 이 경우 의미의 범위가 넓기 때문에 바깥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힘들게 여겨진다(물론 여기에 대해서도 삶의 바깥으로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은 없지 않다. 생명의 의미와 존재의 의미가 그 후보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따로 다루겠다.) 하지만 삶의 의미를 묻는 또다른 방식으로 "내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가능하다. 

추상적인 삶의 의미를 묻는 경우와는 달리 개별적인 삶의 의미를 묻는 경우에는, 삶의 의미의 바깥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쉽게 가능하다. 예컨대 개인의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는 가족, 사회, 역사, 인류, 생명의 의미와 같이 더 넓은 외부의 가치와 관계를 맺을 수 있다. 더 큰 외부의 가치의 네트워크로부터, 마치 의미의 낙수이론처럼, 의미를 전달받는 것이 '논리적으로 가능'하다. 물론 김 교수도 이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많은 독자들은 이렇게 오해할 것이다. 인류 일반에 대해 삶의 의미를 말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면, 개인의 삶의 의미를 말하는 것도 무의미할 것이다, 라고. 아니, 사실은 이 둘을 구별해서 말하는 건지 아닌지도 대부분의 독자들은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그저 '아, 비트겐슈타인이란 유명 철학자가 삶의 의미라는 질문은 논리적으로 볼 때 말이 안 되는 소리라고 했다는 거지"하는 정도로 결론만 취해 갈 것이고 어디가서 누가 삶의 의미에 대해 말하려고 하기만 하면 "야, 삶의 의미라는 건 말이야 질문 자체가 성립하지 않아. 넌센스란 말이지"라고 상대방의 말을 자를 것이다. 

"네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에 대해 "내 인생의 의미는 사회의 발전에 기여하는 것이다."라고 답하는 것은 전혀 동어반복이 아니다. 우리의 생활 속에서 충분히 유의미하게 사용될 수 있는 말이다. 바늘 끝 위에 몇 명의 천사가 춤추느냐를 따지는 것과 다르다. 줄리언 바지니는 인생의 의미가 논리적으로 무의미하다는 주장을 철지난 논리실증주의와 일상언어학파의 잔재로 비판하면서, 인생의 의미의 여러 의미 가운데, "그것은 내게 아주 많은 것을 의미해"에서처럼 "중요한 가치"라는 뜻으로 사용되는 의미는 논리적으로 무의미하지 않다고 반박한 바 있다. 인생은 '내게' 아주 많은 것을 의미할 수 있다. 또는 인생은 '우리에게' 아주 많은 것을 의미할 수 있다. (이에 대한 세부 논의는 줄리언 바지니의 <<빅 퀘스천>>, 211-213쪽 <붉은 청어> 참조) 심지어 인류 전체의 일반적 삶의 의미가 불가능하더라도, 개별적인 삶의 의미는 가능할 수 있다.

물론 논리실증주의자나 일상언어학파가 부정한 의미는 이런 개인적 차원의 의미가 아니라 형이상학적인 의미일 것이고, 김대식 교수가 말한 의미도 형이상학적 의미에 가깝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형이상학적 차원의 의미가 아닌 개인적 차원의 의미를 추구하는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하지 않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개별적 삶의 의미는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을 밝힐 필요가 있다. 형이상학적 수준의 의미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다음에 다루기로 한다.

 


빅 퀘스천

저자
줄리언 바지니 지음
출판사
필로소픽 | 2011-02-15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삶에 의미를 찾는 생각 여행자를 위한 명쾌한 안내서나와 세계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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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깊은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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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사는가?'에 대해 재미있는 블로그 포스팅을 발견했다. 우리가 눈이나 귀에 대해서는 '왜 보는가?''왜 듣는가?'라는 질문을 잘 하지 않는데, 왜 몸(또는 삶)에 대해서만 '왜 사는가?'를 묻느냐 하는 것이다.

왜 사는가라는 질문은 할 필요가 없다. 삶에 이유가 없다면 살 필요가 없다는 말은 의미없고 허망한 진술일 뿐이다.

질문을 이렇게 바꿔보면 어떨까.
왜 보는가? 왜 듣는가? 왜 말하는가?

눈과 귀와 발화기관이 존재하는 것은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다. 주어진 것이므로 보고 듣고 말하는 것이다. 어떤 목적을 위해 보는가? 무엇을 보기 위해..가 아니라면 볼 필요가 없는가?

삶을 택하지 않으면 무엇을 택할 것인가? 삶 이외의 선택지가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가? 애초에 자신의 의지로 삶을 선택한 것이 아니다. 삶은 본능이며 원래 있는 것이며 부정할 수 없는 전제 조건이다.

삶이 고통 그자체라면 삶을 견딜 수 없다면 단 하나의 선택지가 존재하기는 한다. 보는 것이 고통이라면 더이상 아무것도 보고 싶지 않다면 눈을 뽑을 수도 있다. (...).

당신은 눈을 뽑을 것인가? 삶 대신 죽음을 택할 것인가?

보고 듣는 것에 의문을 가지지 않는다면 삶에 대해서도 따로 이유를 찾을 필요가 없다.
따라서 왜 사는가 라는 질문은 적절치 않다. 삶은 절대적 전제이므로. 다만 우리가 질문해야 할 것은 어떻게 살 것인가? 이다. (...)

출처: http://evilbed.egloos.com/4603180

이 논리는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회의주의에 대한 비판과 유사한 것 같다. 우리의 삶의 양식 속에는 근본적으로 자명한 것으로 주어진 것들이 있는데, 이런 것들에 대해 더 확실한 증거를 찾고자 의문을 품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 내게 "당신 손이 두 개인지 확인해 보시오"라고 했을 때 내가 나의 두 손을 들고 보면서 "나는 손이 두 개 있는 게 확실해"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덤앤더머 같은 바보 영화에 나오는 장면으로 여겨질 것이다. 영화가 아니라 현실 속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바보같은 짓을 하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당신들 미친거요? 아니, 우리는 지금 철학을 하는 겁니다....

우리가 제 정신을 가진 인간이라면 손이 두 개라는 것을 못 믿어서 의심을 품는 회의주의적 태도와, 그 회의주의에 맞선답시고 자명한 것을 옹호하려는 행위 모두 약간은 말이 안 되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즉 어떤 근본적인 전제들에 대해서는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더 이상 그 전제를 보다 확실하게 만들거나, 또는 그것을 거짓으로 반증하는 일이 불가능해지는 지점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지점에서 근본명제들에 대해 확증하거나 반증하려는 모든 시도들은 말도 안 되는 넌센스로서, 부조리극을 보는 듯한 느낌을 자아내게 된다.

위 블로그가 제시하는 논증은 비트겐슈타인의 근본명제에 대한 입장과 유사한 것 같다. 삶은 우리에게 자명한 것으로 주어진 것인데 이에 대해 의문을 품고, 왜 사느냐고 묻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라는 것이다. 왜 사느냐고 물어봤자 그럴 듯한 이유가 나오지 않으며(ex. 왜 사는가? 살려고 산다), 별다른 이유가 없다 해서 자살할 것도 아니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삶이 '주어진 것'이라는 주장은 따져보면 부분적으로만 진리이다. 당신이 태어난 것은 주어진 것이 맞다. 그리고 어린 시절에는 산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고 사는 것이 맞으므로 주어진대로 사는 것이 맞다. 하지만, 성인 이후로는 삶이 의식되는 순간들이 있고, 점차 의식적인 삶의 영역이 확대된다. 주어진 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말이다. 실존주의에서 말하는 피투성과 기투성이다. 인간은 현재 속에 이미 던져진 존재지만, 미래를 향해 스스로를 던져야 하는 존재다. 주어진 것과 주어지지 않은 것이 결합되어 있다. 따라서 삶 전체를 이미 주어진 것으로 보는 것은 부분을 전체화한 오류다. (물론 자유의지를 100% 부정할 수 있다면 삶 전체가 주어져 있다는 주장이 가능해질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눈을 뽑을 것인가? 삶 대신 죽음을 택할 것인가?"를 묻고 있지만, 실제로 삶 대신 죽음을 택하는 사람이 있다. <<굿바이 카뮈>>에서 소개한 미첼 헤스먼처럼 멀쩡한 젊은이가 왜 사느냐에 대한 답이 없다는 이유로 철학적 자살을 감행하는 경우가 있다. 적어도 이 사람에게는 삶은 자명하게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살한 것이다.

아마 실은 이럴 것이다: 99%의 사람에게 삶은 자명하고 1%에게는 자명하지 않을 것이다. 그 자명하지 않은 사람도 99%의 시간 중에는 자명하다고 여기지만 1%의 순간에 자명하지 않다고 여길 것이다. 결론은 자명한 사람에게 왜 사느냐의 질문은 넌센스이지만, 자명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그 질문이 넌센스가 아닐 수 있다는 점이다. 인생이 자명하지 않다는 사람에게 인생이 자명한 사람이 왜 사느냐고 묻지 말라고 강요하는 건 맞는 얘길까?

인생이 자명하지 않은 데는 어느 정도 이유가 있다. 왜 보는가를 묻지 않는 이유는 보는 것이 고통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왜 사는가를 묻는 것은 사는 것이 고통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 고통에도 불구하고 살아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이것이 왜 사는가를 묻는 이유 중 하나이며, 이 질문은 언어의 유의미한 사용에 해당할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의 근본명제 가운데도 자명하지 않게 바뀌는 경우가 있다. 1950년대에 "나는 지금 달 위에 있지 않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자명한 얘기였고, 따라서 저런 말을 하는 것은 넌센스가 된다. 1969년 달 착륙 이후로 이 말은 더 이상 자명하지 않게 된다. 따라서 그러한 발언의 진위를 따지는 것이 유의미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누군가에게는, 또는 모든 이의 삶의 어느 순간에는 사는 것이 자명하게 다가오지 않는 시기가 있고 이 때 '왜 사느냐?"의 질문은 유의미할 수 있다. 실제로 일상 생활에서 "왜 사느냐?"의 질문은 "왜 보는가?"라는 질문보다는 말이 안 되는 질문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하나의 표현은 삶의 흐름 안에서만 의미를 지닌다"는 비트겐슈타인의 의미 기준으로 볼 때에도 "왜 사는가?"라는 말이 유의미하게 사용되는 생활 속의 사례는 풍부하게 존재한다.

Posted by 깊은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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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이유로 삶의 의미를 묻는 분들이 꼭 하는 말 가운데 "어차피 죽을 텐데..."라는 표현이 있는데 질문하신 분도 마찬가지군요. 그렇다면 당신은 영화를 볼 때 "어차피 끝날 텐데 영화는 도대체 왜 보지?"라고 질문했던 적이 있나요? 아마 없었을 것입니다. 소설을 읽을 때 "어차피 이야기가 끝날 텐데 소설을 왜 읽지?"라고 의문을 던지는 사람을 주변에서 본 적이 있나요? 아마 보지 못했을 겁니다. 그런 사람을 보았다 하더라도 그 사람의 논리에 설득되지는 않았을 겁니다.

인생 자체를 하나의 이야기로 보거나, 셰익스피어가 말한 대로 한 편의 연극이라고 보았을 때, 이야기가 끝난다고 해서, 연극의 막이 내려온다고 해서 그것의 가치가 훼손되는 것이 아니듯이, 삶이 어차피 죽음으로 끝난다고 해서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허무한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영화를 봤는데, 소설을 봤는데 재미가 너무 없을 때 혹은 예술적 가치가 형편이 없을 때 관객이나 독자가 허탈함을 느낍니다. 허탈함을 넘어 배신감과 분노를 느끼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인생을 살았는데 허무감을 느낀다면 그것은 자신의 삶이 어떤 측면에서 가치없는 삶이(라고 판단하)므로 허무감을 느끼는 것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다면 가치라는 게 뭘까요? 마르크스처럼 노동의 응결물로 볼수도 있고, 철학자 로버트 노직처럼 유기적 통일성으로 정의할 수도 있고, 그저 나에게 혹은 누군가에게 좋은 것으로 정의할 수도 있고, 기타 여러가지 정의가 있을 수 있겠지만, 그 중 유력한 하나는 감정이 '중요'하다고 판단하는 대상들을 말합니다. 우선은 나에게 소중한 것들을 말할 수 있습니다. 나에게 소중한 것들은 나에게 가치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것들은 나에게는 소중한데 타인에게는 쓸모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주관적인 가치는 있되 객관적 가치는 없는 경우입니다. 가치판단 주체의 범위에 따라 나에게 중요한 것, 가족에게 중요한  것, 사회에게 중요한 것, 인류에게 중요한 것, 동물에게 중요한 것, 생명체에게 중요한 것, 지구에게 중요한 것, 신 또는 우주에게 중요한 것 등으로 가치의 범위도 넓어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가치있는 삶이란 무엇일까요. 바로 가치를 생산하는 삶입니다. 이렇게 누군가에게 중요한 것들, 즉 가치를 생산하는 삶을 우리는 가치있는 삶이라 부릅니다. 자기만을 위한 작은 가치를 생산해서 주관적 만족에 그치는 경우도 있을 수 있겠지만, 더 큰 가치를 생산하고 이 가치를 가족, 이웃, 사회, 역사, 생명, 신 또는 우주만물과 주고받음에 성공할 때 더욱 만족스런 삶이 가능할 것입니다. 나만 좋으면 그만이지, 하면서 주관적 가치만을 고수할 수도 있겠지만, 주관적인 가치에 머무는 것은 객관성을 상실하여 가치의 교환에 실패하므로 결국 주관적 만족을 파괴하는 결과로 되돌아 오게 됩니다. 이 경우 삶의 의미는 축소됩니다. 반대로 단계적으로 주고받음의 범위를 넓혀서, 더 넓은 가치의 그물망 속으로 자기의 범위를 확대해나갈 때, 즉 가치의 확대재생산과 교환이 이루어질 때 삶이 의미 있어집니다.

가치를 생산하고, 가치의 교환에 성공했는데도 만족스럽지 않으시다구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무하다고요? 그렇다면 현재의 가치를 생산하는 자기 자신의 크기에 만족하지 못하는 경우일 가능성이 큽니다. 가치의 단순재생산은 일정 시간을 넘어서면 권태와 매너리즘에 빠지므로 점점 더 의미를 상실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이 때는 더 큰 가치의 연결망 속으로 자신을 확장하는 것이 하나의 솔루션이 될 수 있습니다. 동네축구에 만족 못하고 국가대표로 올라설 때, 국가대표로 만족 못하고 프리미어 리그로 올라설 때, 즉 자기 자신을 초월하여 더 큰 가치의 네트워크 속으로 연결되었을 때 의미를 느낄 수 있습니다.

뭐라고요? 가치를 생산하고, 가치의 교환에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를 초월하여 더 큰 가치의 생산과 교환의 단계로 올라섰는데도 불구하고 만족스럽지 않으시다구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무하다구요? 그렇다면 현재의 가치판단 활동을 수행하는 뇌의 기능에 이상이 생겼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 경우에는 정신과 치료를 받는 것이 더 빠른 해결책일 수 있습니다. 뇌 기능이 정상일 경우 인생의 의미는 대체로 가치의 생산 및 교환의 크기와 비례하여 크거나 작아집니다.

(*개정판 수정 사항: 구판에서는 가치의 생산만을 말했는데, 개정판에서는 '생산 및 교환' 전체를 다 말해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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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현의 <<심야치유식당>>에 보니 이런 글이 있다.

어려운 질문, 하지만 피해갈 수 없는 질문 하나. 왜 살지?

백 명에게 물어보면 백 명 모두 다른 답을 말할  것이다. 비슷한 듯이 보여도 짧은 시간 마음 속에서 일어난 갖가지 상념들을 감안하면 겉으로 얘기하는 답은 뻔한 모범답안, 혹은 사람들이 기대하는 답일뿐, 실제로 지금 각자 마음속의 살아가는 이유는 모두 다를 것이다. 아니, 더 깊이 들어가보면 '잘 모르겠어'라는 말을 차마하지 못한 것 뿐일지도 모른다.

왜 사는가를 묻는 질문에 왜 잘 모른다는 답이 나오게 될까?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하나는 살아가는 주체와 대답하는 주체가 다르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대답하는 주체는 '의식'이다. 그런데 살아가는 주체는 '의식'만이 아니다. 무의식도 있고, 욕망도 있고, 몸뚱어리도 있다. 의식이 나를 전부 대표하지 못한다. 왜 사는가의 질문에 의식은 의식으로서의 아는 한도 내에서 답을 할 수 있겠지만, 아직 무의식에게 물어보지 않았고, 욕망에게도 물어보지 않았고, 몸뚱어리에게도 물어보지 않았다. 의식이 아직 유관부서 전체로부터 자료 취합을 못한 것이다. 그러니 제대로 답을 못하는 것이 당연한 일 아닐까?




심야 치유 식당

저자
하지현 지음
출판사
푸른숲 | 2011-03-30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당신은 오늘 몇 분이나 멍한 시간을 가져봤습니까?마음이 춥고 배...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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