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추론들

짧은 생각 2012. 8. 14. 22:08

"진정 행복하기 위해서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어야 한다"-파스칼

"불멸이 없다면 나는 바다에 몸을 던지리라" - 알프레드 로드 테니슨

"사후 세계에 대한 희망이 없다면 이 삶은 아침에 옷을 주워 입을 가치도 없다" - 비스마르크

"우리 삶이 비가역적인 파멸에 처해질 운명이라면, 몇초간만 지속되는 연기에다가 자신의 입상을 새긴 조반니 파피니의 상상의 조각상과 미켈란젤로의 불후의 대리석 조각상도 별반 차이가 없다." - 레세크 콜라코브스키

영원히 살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지만, 내세와 불멸에 대한 이러한 추론은 다음의 추론과 마찬가지로 황당하다.

"진정 재밌는 영화는 끝나지 않고 계속되는 영화라야 한다."

"속편이 계속해서 나오지 않는 영화의 1편은 아무런 가치도 없다."

"끝없이, 영원히 상영되는 영화가 아니라면 바다에 던져버리리라."

"영웅본색2가 나오지 않았다면 영웅본색1은 100원을 주고 볼 만한 가치도 없다."

개인적 의견을 말하자면 영웅본색은 2편이 나옴으로써 1편의 가치까지 훼손한 대표적인 케이스다. 유비하자면 내세가 존재함으로써 현세의 가치까지 훼손할 가능성이 생긴다. 즉 현생에서 성자로 살았는데, 내세에서 다시 태어나 건달이 되었다면 이 사람의 삶의 평균적 가치는 평가절하될 수밖에 없다. 

내세 그 자체가 우리 삶에 없던 의미를 가져다 줄 수는 없다.

"인간의 존재를 포함해서, 어떤 것도 단지 시간의 흐름을 통해서만 의미를 얻을 수는 없다. 거의 보편적으로 정반대의 선입견이 퍼져 있음에도, 인간의 삶이 연장된다는 것은 그 중요성에 아무것도 더해주지 않는다. 만약 인간의 삶이 애초에 의미를 결여하고 있다면, 그 삶의 연장은 무의미성의 확대일 뿐이다." - 리처드 테일러



형이상학

저자
리차드 테일러 지음
출판사
서광사 | 2006-07-30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형이상학에 대한 자상한 입문서. 리차드 테일러의『Metaph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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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가들이 말하듯, "죽기 전에 죽는다면 죽을 때 죽지 않을 것이다." 달리 말해, 만약 바로 지금 분리된 자아의 감각을 버리고 대신 전체로서 완전한 온우주인 참나를 발견한다면, 이 특정한 심신의 죽음은 단지 우리 자신인 영원한 나무에서 나뭇잎 하나가 떨어지는 것에 불과하다.

명상은 그 죽음을 무한한 주시자 안에 안식함으로써, 그리고 대상으로 보일 수 있는 유인하고 객체적인 필멸의 자아와 탈동일시함으로써 바로 지금 연습하는 것이다. 순수한 공 안에서, 광대한 불생자 안에서는 죽음이란 없다. 시간 속에서 영원히 살기 때문이 아니라(영원히 살지는 않을 것이다), 애당초 시간의 흐름 속으로 결코 들어가지 않는 이 영원한 순간의 무한함을 발견하기 때문에, 비어 있는 주시자로서 자유롭게 서서 광대한 불생자 안에서 안식할 때 죽음은 어떤 본질적인 것도 변화시키지 않는다.

<<켄 윌버의 일기>> p. 400

영혼 불멸을 주장하는 신비주의자들의 상투적인 주장은 이승에서의 삶은 환영이며 우리가 태어나서 자라고 늙어서 죽는 것은 진실이 아니라 망상이라는 것이다. 영혼 차원보다 범위를 확장해서 파르메니데스처럼 만물의 변화 자체를 부정하고 세계가 불변의 일자(一者)라고 보는 이들도 있다. 일견 황당하게 여겨지는 이런 주장들이 어떻게 논리적으로, 경험적으로 가능할까? 켄 윌버에 따르면 최상위 수준에서 깨달은 사람은 인류 역사상 몇 십명이 되지 않는다. 영혼 불멸을 경험적으로 깨달은 사람의 숫자가 수십 명이라면, 깨달은 수십 명과 깨닫지 못한 수백억 사이의 대화는 원초적으로 불가능하다. 대화는 생활양식의 공유, 체험의 공유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이러한 체험적, 생활양식적 공유가 전제되지 않은 의사소통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켄 윌버는 합리적 수준을 넘어서야 이를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합리를 넘어서면 그때부턴 진짜인지, 사기인지, 혹은 망상인지 판별할 기준이 없어진다. 

내 나름대로 영혼 불멸에 대해 논리적인 모순 없이, 신비주의를 걷어내고 합리적으로 설명 가능한 모형을 생각해봤다.

위 그림에서 영혼을 하늘색의 3차원 구(球)라고 가정해보자. 그리고 이 세계를 2차원 평면이라고 상정해보자.(=3차원 구를 실체라고 하고, 2차원 평면을 현상계로 보아도 좋다) 그러면 우리의 삶은 3차원 구라는 실체가 위에서 아래로 이동하면서 2차원 평면을 통과하는 과정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통과의 과정에서 2차원의 평면에 그려지는, 구와 평면이 교차하는 접면의 면적의 변화가 우리의 의식 속에서 체험되는 삶의 궤적이 된다. 이를 단계별로 구별하면:

3차원 구의 맨 아랫 부분(=남극)이 처음 평면에 닿는 순간(빨간 점)이 2차원 면의 관점(우리의 의식)에서는 탄생으로 나타난다. 3차원 구 자체는 원래부터 존재하던 것이므로 실제로 탄생한 것은 아니지만(스스로 그렇게 3차원 구로 존재할 뿐이다), 2차원 평면의 현상계에서는 기존에 존재하지 않던 생명이 처음으로 생겨난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시간이 갈수록 구가 아래로 이동하면서 구와 평면이 교차하는 면적이 점점 커진다. 이것이 성장의 과정으로 나타난다. 이 성장은 구의 절반(=적도)에 이르렀을 때 가장 큰 원이 평면에 그려지면서 정점에 이르고, 적도를 지나가면 점점 교차하는 원의 크기가 작아지면서 쇠퇴한다. 그러다가 구의 위쪽 끝(=북극)이 평면에 닿는 순간(빨간 점)에 죽어서 사라지는 것으로 보인다.

2차원 평면의 세계(우리의 경험 세계)에서 보면 이 과정이 사람이 탄생해서 성장하고 쇠퇴하다가 죽는 변화의 흐름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3차원 구 자체의 관점에서 보면 본래 모습(영혼이든, 실체든, 자아든)은 3차원 구의 형태를 유지하면서 변하지 않는다. 이미 완전한 구의 형태로 결정되어 있어, 파르메니데스가 말한 것처럼 불변의 일자로 존재할 뿐이다. 그것이 2차원 평면을 통과하면서 생로병사의 변화로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의 영혼(또는 실체, 본체, 자아)은 마치 이미 찍어놓은 영화의 필름처럼 3차원 실체로서 불변이고 무시간적이며, 우리의 삶은 이 3차원 필름을 2차원 평면에서 시간적으로 풀어내면서 상영하는 것과 유사하다.

이 2차원 평면은 현재라는 시간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우리의 인식이 진행되는 주체로도 해석할 수 있다. 어쩌면 이 둘을 합쳐서 주체의 시간 의식이라고 볼 수도 있다. (평면을 시간으로 해석할 때 평면의 아래 부분은 과거가 되고, 평면의 윗 부분은 미래가 된다.) 3차원 구는 우리 삶 전체를 구성하는 사건들의 전체 집합이다.

이렇게 우리의 삶 전체를 하나의 영화처럼 완결된 사건들의 집합으로 보는 해석이라면 영혼 자체는 불변한다는 주장이 논리적으로 성립할 수 있다. 3차원 구는 본질계, 물자체이고 2차원 평면은 우리의 인식에 나타나는 현상계다. 이 모델이 참이라면 영혼이 불변한다는 주장이나 세계가 불변한다는 주장이 참일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이 모델의 진실성을 어떻게 검증할 것인가. 켄 윌버 식으로는 명상을 통해 깨달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깨달은 사람은 수십 명이란다. 지금까지 살다가 죽은 인류의 총수가 1천억명인데, 이 가운데 깨달은 사람은 겨우 수십 명이다. 이들의 주관적 체험이 사실인지 망상인지 검증할 방법이 없다. 1천억분의 수십의 비율이라면 정상인 대 정신병자의 비율만도 못한 것이다. 깨달은 사람이 훨씬 더 많아져야만 검증 혹은 반증이 가능할 것이다. 



켄 윌버의 일기

저자
KEN WILBER 지음
출판사
학지사 | 2010-01-10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켄 윌버의 일기』은 통합적 영성의 탐구자 켄 윌버의 개인적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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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시 베링의 <<종교 본능>>을 번역하면서 에피쿠로스의 죽음 논증의 다른 측면을 발견했다. 에피쿠로스의 죽음 논증은 우리가 죽음을 체험할 수 없으므로, 즉 살아있는 동안에는 죽음이 아직 우리에게 오지 않은 것이고 죽은 다음에는 그것을 의식할 내가 없는 것이므로 죽음에 대해 전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 논증의 목적은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설득하는 것이었다.

제시 베링은 죽음에 대한 공포관리 이론을 반박하기 위해 시뮬레이션 제약 가설을 들고 나온다. 공포관리 이론은 우리가 죽음에 대한 공포를 경감하기 위해 영혼 불멸과 내세라는 관념을 만들어냈다고 보는 것이다. 반면 시뮬레이션 제약 가설은 우리가 죽음에 대해 제대로 사유할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내세를 만들어냈다고 본다. '죽음을 의식적으로 의식할 수 없다'는 전제에 대해서는 제시 베링과 에피쿠로스의 견해는 일치하는데 결론은 서로 다른 곳으로 간다.

에피쿠로스는 죽은 다음엔 소멸만 있을 뿐인데, 소멸한 우리는 소멸 상태를 의식할 수 없으므로 소멸로서의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제시 베링은 죽음은 소멸이 맞지만 여기에 주목하기 보다는 우리가 소멸 상태를 '잘' 의식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인간의 의식은 무(無)를 제대로 시뮬레이션하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기껏 죽음을 어두움, 암흑, 침묵, 빈 공간에 무한히 머무르는 것 정도로 상상할 수 있을 뿐인데, 무란 이런 비유조차 허용하지 않는 상태, 즉 어둠, 암흑, 침묵, 빈 공간조차 없는 상태를 말하기 때문에 인간이 무에 대해 시뮬레이션한 모든 것은 진짜 무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무라고 애써 떠올리며 상상하는 모든 것들은 사실 일종의 유라는 것이다. 즉 죽음과 무에 대한 우리 의식의 시뮬레이션에는 근본적인 제약이 있다는 것이다.

제시 베링은 우리가 죽음에 대해 제대로 사유할 수 없는 이유를 진화적 생존가치가 없다는 데서 찾고 있다. 진화는 생존을 위한 것이다. 죽은 다음에는 살아있을 필요가 없으므로, 죽음에 대한 인식은 진화적으로 별 생존가치가 없다. 따라서 우리의 뇌는 죽음을 시뮬레이션하는 의식을 진화시키지 못했다. 이러한 죽음에 대한 시뮬레이션 능력의 제약 속에서 우리 마음은 죽은 이후에도 다른 공간에서 영속한다는 어렴풋한 느낌을 가지게 되는데 이것이 내세 관념을 만들어 냈다는 것. 그리고 내세라는 독특한 공간에서 지속되는 마음은 불멸하는 영혼의 관념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는 것이다.

결론: 의식은 의식의 소멸을 의식할 수 없기 때문에 의식의 불멸을 믿을 수밖에 없다.

마음이론을 재밌게 다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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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학적 죽음을 넘어선 시간적 한계의 초월로서의 인생의 의미를 추구하다보면 불멸이라는 논리적 종착지에 다다르게 된다. 흔히 하는 생각은 자손을 통한 불멸이다. 요즘처럼 결혼 포기 세대가 많아진다면 자손을 통한 불멸은 몇 대를 보장하지 못할 것이다. 칸트의 부모처럼 자신들의 외아들이 독신자로 생을 마감한다면 생물학적 불멸의 시도는 일찌감치 좌절된다. 하지만 칸트는 철학사에 불멸의 이름을 남기지 않았던가. 생물학적 한계초월은 실패했지만, 명성의 불멸을 얻은 셈이다. 그렇다면 칸트의 부모는? 칸트의 부모라는 불멸의 명성을 얻은 것인가? 무언가 자연스럽지 않다. 도대체 우리가 불멸을 추구한다는 주장이 몇 퍼센트의 확실성으로 사실이란 말인가. 95% 신뢰도에 +/-5% 정도의 오차를 허용하는 정도의 진리값은 가지고 있을까?

밀란 쿤데라의 <<불멸>>에서는 헤밍웨이와 괴테가 책을 통한 불멸을 이야기한다.

-당신은 불멸자가 되려고 온 힘을 다 기울였소.
-말도 안 돼요. 난 다만 책들을 썼을 뿐입니다.
-바로 그거요! 괴테가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나의 책들이 불멸하는 데 대해선 전혀 반대할 의사가 없어요. 나는 사람들이 감히 단어 하나 함부로 바꾸지 못하게 책들을 썼지요. 그 책들이 어떤 악천후에도 견딜 수 있도록 전력을 기울인 건 사실이지만, 인간 어네스트 헤밍웨이에 관해서는 불멸이 되건 말건 내 알 바 아니었소!

많은 사람들이 헤밍웨이처럼 책이나 예술 작품을 통한 불멸이 가능하다는 가정을 손쉽게 받아들이는 듯하다. 하지만 여기에도 1%의 법칙이 적용된다. 작품 가운데 헤밍웨이 급이 아닌 99%의 대다수는 1년도 못 견디고 사라진다. 한국에서 1년에 출간되는 책의 종수는 3만5천 종이 넘는다. 이 가운데 저자의 생물학적 수명보다 오래가는 책은 얼마나 될까? <<종교본능>>의 저자 제시 베링은 책을 통한 불멸의 가능성에 희망을 품는 사람들에게 찬물을 끼얹는다. "내 책이 출간 후 1년 뒤에도 맥박이 뛰고 살아있다면 상당히 운이 좋은 경우일 것이다." 결국 책을 통한 불멸의 가능성도 자손을 통한 불멸보다 오래갈 가능성이 높지 않다.

그래서 현실주의자 우디 알렌은 보다 직설적으로 말한다: "나는 내 작품을 통해 불멸을 얻기를 바라지 않는다. 나는 죽지 않음으로써 불멸하고 싶다. 나는 사람들의 가슴 속에서 영원히 살고 싶지도 않다. 나는 내 아파트에서 영원히 살고 싶다"라고.  물론 이것은 바램일뿐 현실적이지 않다. 내 생각은 개인 속에서 불멸을 찾아서는 답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인류 전체라면 좀 더 가능성이 높겠지만, 1억년 후 인류의 후손이 생존해 있다면 그들의 모습은 전혀 지금의 인류와 달라져 있을 것이므로, 인류 단위보다는 좀더 넓은 생명체의 단위에서 불멸을 가능성을 모색해봐야 할 것이다.

불멸
카테고리 소설 > 기타나라소설
지은이 밀란 쿤데라 (민음사,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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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의식은 무를 인식하는 능력을 개발하지 못했다 한다. 왜냐하면 무를 인식하는 것이 진화적으로 생존가치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 존재하는 것이 나에게 해가 되고 이익이 될 수 있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은 나에게 해도 아니고 이익도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굳이 아까운 뇌 자원을 없는 것을 인식하는 능력을 얻기 위해 투입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가 무를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으로부터 어떤 결론이 도출되는가. 우리는 자신의 죽음 이후 무화(無化)된다는 것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에피쿠로스는 이성적 사유를 통해 우리가 죽음을 결코 체험할 수 없음을 깨달았지만, 그 말의 의미를 몸으로 실감하기란 쉽지 않다. 우리는 기껏 죽음이 심연이며, 블랙홀이고, 경험의 종말이며 영원한 무, 존재의 영구적 소멸이라고 생각하지만 이것은 단지 무의 물화다. 그리하여 우리의 마음 이론은 죽음 이후 우리의 육체를 떠난 마음이 이 세상이 아닌 어떤 다른 공간에 (그것이 천국이든 암흑 속의 공간이든) 지속적으로 존재한다는 환상을 가지게 된다. 이것이 바로 내세에서 불멸하는 영혼이라는 환상으로 재구성되어 나타난다.

이에 따르면 내세에 대한 믿음은 종교에서 비롯되거나, 죽음에 대한 공포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진 마음이론의 불가피한 부산물이다. 우리 마음이론은 죽은 이후를 사유하는 데 적합치 않을뿐더러 완전히 실패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의식은 의식을 부재를 의식적으로 체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괴테는 "모든 사람은 자신의 불멸해 대한 증명을 내부에 간직하고 있다"고 말했고, 프로이트는 "모든 사람들은 무의식에서 자신의 불멸을 확신하다"고 말했으며, 영국 시인 존 게이는 1732년 자신의 묘비명에 "인생은 장난이다. 모든 것이 그것을 보여준다. 나는 한때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이제는 그것을 알고 있다."라고 썼던 것이다.

-제시 베링, <종교 본능>


우리는 절대 자신의 죽음을 체험할 수 없기 때문에, 결코 자신의 죽음을 실질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 오직 타인의 죽음만 체험할 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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