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뢰딩거는 의식의 단수성, 즉 세상의 모든 의식은 결국 하나라는 주장을 하기 위해 의식이 다수라는 통념을 해체하는 논리를 편다. 우리의 상식은 의식의 다수성을 전제한다. 나의 의식, 너의 의식, 그의 의식, 그녀의 의식은 모두 다르기 때문에 의식은 복수라고 보는 게 우리의 상식이다.
의식의 다수성을 주장하는 논리 중 하나는 의식의 단수성의 전제인 초개인적 의식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다. 우리의 개인적 의식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기억으로 연결되어 자기동일성이 유지된다. 10년 전 기억, 1년 전 기억, 어제의 기억들이 그때의 나와 오늘의 나를 이어주어 자아라는 자기동일성이 성립된하다. 반면 우리는 조상들의 기억을 기억하지 못하므로, 초개인적 의식에 대해서는 기억의 연속성에 입각한 자기동일성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시간적으로 초개인적 기억이란 조상들의 기억들과 나의 기억의 총합 또는 전생의 기억들과 나의 기억의 총합인데, 나는 그러한 기억들을 가지고 있지 않다. 즉, 조상들의 기억 또는 전생의 기억들은 나의 기억과 내용적으로 분리된 타인의 기억일 뿐이다. 공간적으로도 타인의 기억은 나의 기억과 분리되어 있다. 예컨대 나는 내 친구의 기억 내용을 기억하지 못한다. 따라서 의식은 시간적, 공간적으로 단수가 아니라 복수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슈뢰딩거의 반론은 이렇다(책에서는 시간적 초개인적 기억에 한정되는 반론만 구체적으로 나오는 듯하다): '개인적 수준'의 의식 또한 기억의 연속성 면에서 초개인적 수준의 기억의 연속성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당신은 잠에서 깨어났을 때 어제 한 일을 전부 기억하는가? 일부는 기억되고 일부는 사라진다. (기억의 불연속성을 다루는 논리는 <<굿바이 카뮈>>에서 제시한 다음 논리와 유사함). 당신은 서른 살이 되었을 때, 다섯살 이전의 기억이 남아 있는가? 대부분의 기억은 상실되고 극히 일부만 단편적으로 기억할 것이다. 슈뢰딩거는 나와 동일한 불연속성 논리를 상대적으로 단기적인 기억에 대해 적용하고 있는 셈인데, 두 경우 모두 기억을 통한 개인의 자기동일성은 이처럼 불연속적이고 단편적인 기억들에 의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슈뢰딩거는 개인의 기억이 불연속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태어나면서 조상들의 전생을 전부 기억하는 건 아니지만, 그것들이 우리의 무의식과 유전자 속에 본능이란 기억으로 일부 살아남아 있음을 주장한다. 예를 들어 뱀을 보면 이전에 물린 적이 없는 어린애라도 무서워한다든지 하는 생득 본능들...물론 이러한 기억은 '의식'적 수준의 기억은 아니지만, 자기동일성이 반드시 '의식'을 기준으로만 성립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어쨌든 그 기억이 기록된 곳은 '나'의 두뇌, '나'의 몸뚱어리의 세포 속이기 때문이다. 본능, 혹은 유전적 정보 같은 '초개인적 기억'은 분명히 조상으로부터 내게 전달되는 것이며, 이에 따라 우리는 비록 의식적이지는 않지만 기억의 자기동일성이 세대를 통해 전달된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만일 의식의 다수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처럼 조상들의 전생의 '모든 것'이 '의식적으로' 기억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것을 타인의 기억으로 본다면, 모든 것이 의식적으로 기억나지 않는 초등학생 시절의 나, 중학생 시절의 나 뿐만 아니라 어제 새벽 3시 잠에 빠져 있던 나 역시 내가 아니라 타인이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초개인적 의식의 존재을 부정하는 논리적 무기는 개인적 기억에 입각한 자기동일성을 부정하는 데에도 동일하게 사용될 수 있는 셈이다. 정확히 슈뢰딩거의 말을 옮긴 것은 아니지만 그 취지를 볼 때, 기억의 자기동일성 논리는 이렇게 논박된다.
My View of the World
- 저자
- Schrodinger, Erwin 지음
- 출판사
- Cambridge | 2009-04-03 출간
- 카테고리
- 인문/사회
- 책소개
- A Nobel prize winner, a great man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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