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2.06.05 행복은 인생의 목적일까 2 1
  2. 2012.05.29 행복은 인생의 목적인가 1
  3. 2012.04.04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

2. 목적과 결과 논증

행복은 인생의 목적이 아니라, 다른 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추구한 결과로서 나타나는 부산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래야 자연스럽다. 안 그러면 객관적 가치가 없는 주관적 관념론으로서의 행복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예를 들어, 배 고픈 사람이 밥을 먹고 배가 부르면 행복을 느낀다. 이 때 이 사람은 행복을 추구한 것일까, 밥을 추구한 것일까? 몸이 필요로 하는 것은 행복이라기 보다는 밥이다. 최소한 1차적으로 필요로 하는 것은 밥이 분명하다. 따라서 행복하기 위하여 밥을 먹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밥을 먹은 결과로 행복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 즉 행복을 추구한 결과로 밥을 먹는 것이 아니라, 밥을 먹은 결과로서 행복한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행복은 상위의 목적이 아니라 성취의 결과로서 수반되는 어떤 것일 수 있다. 행복이 목적이 아니라 어떠한 성취의 결과로서 행복이 수반된다는 것은 심리학자 빅터 프랑클도 지적한 바 있다. 프랑클에 따르면 인간은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다.

행복이 인생의 궁극적 목적이라면 다른 것들을 모두 수단으로 삼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비합리적이며 심지어 기괴하기까지 하다. 행복이 최고의 목적이라면 어떠한 경우에도 반드시 행복해야 하며 불행은 최대한 피해야 할 어떤 것이 된다. 그런데 이 경우 내용없는 행복이 가능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행복 알약이라는 것이 있다고 하자. 어떠한 상황에서도 이 알약을 먹으면 일정 시간 동안 행복을 느낄 수 있게 된다. 그런데 갑자기 부모님이 돌아가셨다고 가정해보자. 이 경우 우리는 엄청난 슬픔 속에서 불행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행복이 인생의 궁극적 목적이라면,  부모가 돌아가셨다고 해서 불행하다고 느껴서는 곤란하다. 빨리 행복 알약을 하나 먹어서 슬픔을 떨쳐버리고 행복감을 느껴야 한다. 그러면 부모가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슬퍼하지 않고 행복한 감정을 느낄 수 있게 된다. 궁극적 목적으로서의 행복을 최악의 상황에서도 이룰 수 있게 된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부모가 죽었는데 행복하다니, 뭔가 내용과 형식 사이의 불일치가 있는 것 같지 않은가? 원인과 결과 사이의 어긋남이 발생한 것 같지 않은가?

어떠한 사건이 발생한다 하더라도, 예컨대 내 아이가 교통사고가 나서 불구자가 되든, 내 사업이 망하든, 사랑하는 애인과 헤어지든, 나라가 망하든, 지구가 멸망하든 사건의 내용과 무관하게 언제나 행복할 수 있다. 행복이 인생의 궁극적 목적이라면, 어떠한 경우에도 행복해야 한다면,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할 도구만 갖추게 된다면, 우리는 이러한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이것이 도대체 합리적인 일일까. 이것이 과연 우리가 바라는 삶일까?

'반행복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소한 행복, 어부와 MBA  (0) 2012.07.26
행복은 인생의 목적인가  (1) 2012.05.29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  (0) 2012.04.04
Posted by 깊은생각
,

행복이 인생의 목적이 될 수 없음에 대한 철학적 논증이 꽤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행복이 인생의 목적이라는 주장이 마치 자명한 공리처럼 통용되는 것이 현실이다. 김어준의 <<건투를 빈다>>를 보니, "우리가 다 행복하려고 이 지랄을 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식으로, 마치 너도 알고 나도 알고 있다는 투로 동의를 강요하고 있다. 아니다! 겉보기와는 달리 행복이 인생의 목적이라는 주장은 별 근거가 없다. 이 세계가 웃긴 것이, 보겠다는 사람에게는 보고 싶은 것을 보여주는 속성이 있어서 '어, 어'하는 사이에 쉽게 속아넘어 가게 된다. 행복이 인생의 목적이 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몇 가지 논증을 시도해보자.

1. 목적과 수단, 전체와 부분 논증

행복이 인생의 목적이라고 하자. 목적은 수단과 대비되는 개념이다. 따라서 행복이 인생의 목적이라면, 인생은 행복의 수단이 된다. 행복이 인생의 목적이라는 주장은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익히 들어온 말이라서 별로 이상한 느낌을 주지 않는다. 하지만 인생이 행복의 수단이라는 주장은 매우 낯설게 느껴진다. 왜 그럴까?

인생이란 우리 삶의 전체인데 반해, 행복은 인생의 어느 순간에 느끼는, 상대적으로 오래 지속되는 긍정적 감정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 긍정적 감정에는 행복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다. 앤드루 커노한이 <<종교의 바깥에서 의미를 찾다>>에서 말한 것처럼, 

행복은 수많은 강렬한 정서 중 하나에 불과하다. 행복은 감사, 즐거움, 유쾌함보다는 더 강렬한 반면 의기양양, 기쁨, 환희, 희열, 지복, 황홀, 도취보다는 약한 정서다. 행복이 하나의 정서에 불과하다면 이런 정서를 추구하는 것이 어떻게 인생의 올바를 목적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유사한 정서 중 환희나 희열 같은 더 강렬한 정서를 추구하면 안 된단 말인가?

앤드루 커노한, <<종교의 바깥에서 의미를 찾다>>, p. 260

즉 행복은 인생의 여러 체험 가운데 하나인 정서 체험이며, 정서 체험 가운데 하나인 긍정적 정서체험이며, 긍정적 정서체험 가운데 상대적으로 온건한 하나의 체험일 뿐이다. 인생이 전체라면, 행복은 부분이다. 아니 부분의 부분의 부분이다. 따라서 행복이 인생의 목적이라는 주장은 부분이 전체의 목적이라는 말과 같다. 이것은 "대한민국의 목적은 이명박이다"라든가 "내 인생의 목적은 나의 간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오류다. 행복을 인생의 목적으로 추구했을 때 나타날 결과는, 지난 4년간 마치 이명박 일당이 대한민국 전체의 목적인 것처럼 정치했을 때 나타난 결과와 유사할 수 있다.



종교의 바깥에서 의미를 찾다

저자
앤드루 커노한 지음
출판사
필로소픽 | 2011-11-14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무엇이 우리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가!나와 세계 그리고 삶의 의...
가격비교


2. 목적과 결과 논증

행복은 인생의 목적이 아니라, 다른 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추구한 결과로서 나타나는 부산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래야 자연스럽다. 안 그러면 객관적 가치가 없는 주관적 관념론으로서의 행복으로 전락한다.(to be continued)

'반행복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소한 행복, 어부와 MBA  (0) 2012.07.26
행복은 인생의 목적일까 2  (1) 2012.06.05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  (0) 2012.04.04
Posted by 깊은생각
,

아리스토텔레스가 많은 이들에게 심어놓은 편견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무거운 것이 빨리 떨어진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행복이 인생 최고의 목적이라는 것이다. 첫번째 과오는 갈릴레이가 피사의 사탑에서 실험을 함으로써 깨졌는데, 두번째 과오는 아직도 맹위를 떨치고 있다.

사실 아리스토텔레스로서는 억울할 수도 있겠다. 우리말로 행복, 영어로 happiness로 번역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원어는 eudaimonia인데 직역하면 '훌륭한 영적 존재'라는 뜻이다. 오늘날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오래 지속되는 긍정적 감정으로서의 행복과는 거리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행복'은 굳이 말하자면 역사적으로 특수한, 즉 고대라는 시간과 그리스라는 공간에 한정된, 철학적 개념으로서의 행복이다. 현대 일상 용어로서의 행복과는 싱크로율이 50% 정도밖에 안될 것 같다.

실제로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읽어보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인생의 목적으로서의 행복 개념은 오늘날에는 별로 적실성이 없다고 보인다. 철학적 개념으로서의 행복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하는 인간의 본질인 '이성'을 가장 잘 발휘해서 고대 그리스에서 핵심 덕목이었던 용기, 정의, 우애, 관대함 등에서 탁월하게 사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날 우리의 관점에서 볼 때, 뭔가 개념이 한 곳에 모이지 않고 여러군데 흩어진 것을 얼기설기 모아서 엉성하게 하나의 이름으로 부르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진다.

논증 자체도 허술하다:

-행복은 가장 좋은 것, 최고선이다. 최고선은 다른 것을 위한 것이 아닌 그 자체로 목적인 것이다.

-행복이 무엇인지 알려면 인간의 기능을 알아야 한다. 좋음(잘함)은 항상 기능에 있어서 좋은 것, 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능에서 좋은 것/잘하는 것은 탁월성이다.

-인간의 기능은 무엇인가? 이성이다.

-따라서 인간적인 좋음은 탁월성에 따른 영혼의 활동이다. 그것은 바로 관조이다.

-관조는 최고의 활동이며, 가장 연속적이고, 지혜에 따르는 활동이 가장 즐거우며 자족적인 것이다.

-이러한 삶은 인간적 차원보다 높은 것이며 신적인 것이다.


줄리언 바지니는 <<빅 퀘스천>>에서 인생의 목적을 행복이라고 보는 것을 논박하는 데 그치지 않고, 최고의 행복을 관조라고 본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을 철학자의 '직업적 편견'으로 폄하한 바 있다. 

굳이 아리스토텔레스를 변호하자면, "인생의 목적은 행복이다"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은 "인생의 목적은 훌륭한 삶을 사는 것이다"라고 해석해야 옳을 것 같다. 이렇게 바꿔놓고 읽어보면 별로 정보가치가 없는 당연한 말이 되고 만다. "인생의 목적은 훌륭하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이다"라는 말을 반박하는 데 굳이 철학적 논증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처럼, 인생의 목적이 훌륭한 삶은 사는 것이라는 말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도 철학적 논증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가 한 작업은 그러면 훌륭한 삶이란 무엇이냐를 따져보는 것으로 전환된다.

크게 보아 아리스토텔레스가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전개한 논증은 인생의 목적이 행복임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라기 보다, 훌륭한 삶이란 무엇인가를 논증한 것으로 봐야 할 것 같다. 즉,

"인생의 목적은 행복이다"라는 주장은 논증이 필요하다. 오늘날의 의미로 볼 때 인생에는 분명히 행복이 아닌 다른 많은 가치들이 있는데, 다른 가치를 제쳐두고 행복이 인생의 목적이라고 했을 때에는 정당화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생의 목적은 훌륭한 삶을 사는 것이다"라는 주장은 별다른 논증 없이도 직관적으로 수용가능한 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면 훌륭한 삶이란 도대체 뭔데?라는 질문이 나오고, 여기서 "훌륭한 삶은 이성적 탁월함의 최고 활동으로서 철학적 관조다"라는 정보 가치가 있으면서 정당화가 필요한 결론이 도출된다. 물론 이 결론은 철학자들이 아닌 한 별로 동의할 수 없는, 직업적 편견으로 가득찬 생뚱맞은 결론이긴 하지만 말이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국내도서>인문
저자 :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 김상진,김재홍,이창우역
출판 : 길 2011.10.17
상세보기


'반행복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소한 행복, 어부와 MBA  (0) 2012.07.26
행복은 인생의 목적일까 2  (1) 2012.06.05
행복은 인생의 목적인가  (1) 2012.05.29
Posted by 깊은생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