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해 같은 시인도 삶의 목적은 삶 자체라는 말을 쉽게 하는데, 삶의 목적이 삶 자체라는 주장이 절대적 진리가 될 수 없다는 것은 자살하는 사람들이 몸소 보여주고 있다. 삶의 목적이 삶 자체라는 건, 삶의 내용, 삶의 질과 무관하게 살아있음 자체가 목적이라는 얘기인데, 이 말이 참이려면 자살하는 사람이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노무현 대통령은 뇌물수수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는 치욕적인 삶을 견디지 못해 자살했다. 어떤 사람에게 치욕적인 삶은 삶의 목적이 되지 못한다. 반면 전두환 같은 사람은 치욕적인 삶을 견딜 뻔뻔함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인간에게는 삶의 목적은 삶 자체라는 주장이 옳을 수도 있겠다.
그런데 "삶의 목적은 삶 자체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의 의도는 누구한테는 그렇고, 누구한테는 그렇지 않다, 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모든 이에게 그렇다는 취지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살하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러한 주장에 대한 충분히
근거있는 반증이 될 수 있다.
물론 이렇게 반론을 제기하면서 빠져나갈 수 있다. OECD
최고 수준이라는 한국의 자살자 수는 10만명 당 40명 수준이다. 한국이 신자유주의니, 양극화니, 승자독식 사회니 말이 많아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율은 0.04% 정도밖에 안 된다. 그렇다면 99.96%의 확실성을 가지고 삶의 목적은 삶 자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99.96%는 삶 자체를 목적으로 삼고 살아간다고 할 수 있다, 라고. 다시말해 삶의
목적이 삶 자체라는 주장은 절대적 진리는 되지 못해도, 보편적 진리는 될 수 있다고...
과연 그럴까. 99.96%라는 숫자는 삶 자체가 목적이라는 보편적 법칙성을 반영하는 수치가 아니라 21세기 대한민국의 사회, 경제,
문화, 건강 등의 조건을 반영하고 있을 뿐일 수 있다. 만일 삶의 조건이 좀더 괴로워진다면 그 숫자는 금세 99.96% 밑으로 떨어질 것이다. 삶의 조건이
현격할 정도로 악화된다면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살아가겠다고 하는, 소위 '삶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사람들의 수 역시 현격히
줄어들 것이다. 가령 대한민국 국민의 50%가 고통스런 불치병에 걸렸다고 가정한다면, 자살율은 단지 몇 퍼센트 수준이 아니라 수십
퍼센트로 올라갈 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정신적, 육체적으로 괴롭고
고통스러운 삶의 경우에는 삶을 그 자체로 목적이라고 주장하기에는 그렇지 않다고 판단하고 의사결정을 내리는 사람의 수가 많다는
사실이다. 정신적, 육체적으로
고통스러운 삶은 일정한 수준이 넘어가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삶을 포기하는 임계치가 있다. 물론 임계치를 넘지 않는 고통이라면(예컨대 니체가 말한,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강하게 만든다는 식의) 오히려 삶의 의미를 느끼게 하겠지만, 임계치를 넘는 고통 속에서 삶은 목적이
되기 보다는 벗어던져야 할 짐이 되고 만다. 물론 지옥에서도 악착같이 적응하는 인간이 나타날
수도 있겠지만, 인류 전체를 놓고 보면 삶의 목적이 삶 자체라는 주장은 임계치를 넘는 고통스런 삶에서는 일반적으로 통하지 않는다고 봐야 한다.
즉, 삶은 그 자체로 목적인 것이 아니라, 고통이라는 변수에 따라 목적이 될 수도 있고,
짐이 될 수도 있는 가변적인 어떤 것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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