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안에서의 생명의 의미를 묻는 질문에 대한 슈뢰딩거의 답변에는 철학적으로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곳의 생명은 우주의 아주 작은 공간에 국한되어 있습니다. 또는 매우 짧은 시간 안에 국한되어 있는지도 모릅니다....나는 공간에 두려움을 느끼지 않듯이 시간에도 더 이상 두려움을 느끼지 않습니다."(<<슈뢰딩거의 삶>>, 227쪽)
가로를 공간, 세로를 시간축으로 하는 2차원 좌표를 놓고 삶의 궤적을 그릴 때, 공간적 범위의 제한과 시간적 범위의 제한은 가로, 세로 방향만 다를 뿐, 양적으로는 동등한 성질로 나타난다. 삶의 시간적 제한(수명)이 70년이라면, 생명체로서의 공간적 제한(몸)은 약 170cm 안팎이다. 이 때 우리는 공간적 범위의 제한에는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내 키가 170cm까지 크고 더 이상 커지지 않는다는 사살에 대해 무서워하지 않는다. 반면 삶이 대략 70세에서 끝난다는 시간적 범위의 제한, 즉 죽음에 대해서는 두려움을 느낀다. 이것은 이상한 일이다. 왜 시간적으로는 영원히 살고 싶어하면서, 공간적으로는 무한히 커지고 싶어하지는 않는 것일까. 공간적으로 무한히 확장되는 것에 매달릴 필요가 없다면, 시간적으로 무한히 존속하는 것에도 매달릴 필요가 없는 것 아닐까? 슈뢰딩거는 이렇게 생명의 시간적 제한을 공간적 제한과 같은 것으로 간주하는 방법을 통해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우리가 과연 공간적 제한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인지는 따져봐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공간적 범위의 제한이 만일 우리의 몸뚱아리의 크기나 몸무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향력의 범위, 예컨대 권력, 영향력 같은 것이라고 본다면 우리는 공간적 범위의 제한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는 두려워움을 느끼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물론 시간적 범위의 제한에 대해서보다는 일반적으로 그 강도가 약하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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