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카뮈가 <<시지프 신화>>에서 말한 "왜 자살할 수 있는데도,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의 구조는 "왜 아무것도 없지 않고 무언가 있는가?"와 유사하다. "자살(죽음) : 삶 = 무 : 존재"라는 형태로 상응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카뮈의 질문에 대한 대답도 후자의 질문에 대한 대답과 유사한 패턴으로 제시할 수 있다.
2. 먼저, 왜 아무것도 없고 무언가 있는가에 대한 대답은 "모든 것이 가능하다"라는 전제로부터 도출될 수 있다. 모든 것이 가능하다면, 아무것도 없는 것도 가능하고 무언가 있는 것도 가능하다. 두 사건의 확률을 각각 50%라고 한다면, 무언가 있을 확률은 50%다. 따라서 무언가가 있다는 것은 50%의 확률을 가진 전자의 사건이 발생하지 않고, 50%의 확률을 가진 다른 발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전을 던졌는데 뒷면이 나오지 않고 앞면이 나온 것과 같다.
또는 다중세계이론에 따라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가능한 모든 세계에는 아무것도 없는 세계가 가능하고, 무언가 있는 세계도 가능하다. 각각의 논리적 확률은 50%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있는 세계는 무언가 있는 세계이다. 물론 아무것도 없는 세계는 가능하겠지만, 그곳에는 아무도 없고, 세계조차 없다.
이것은 사태를 단순화해서 본 것이고, 좀더 정확하게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아무것도 없는 세계는 한가지 방식으로만 가능하다. 반면 무언가 있는 세계는 무수히 많은 여러가지 방식으로 가능하다. 그렇다면 아무것도 없는 세계의 확률은 매우 낮고, 무언가 있는 세계의 확률은 매우 높다. 따라서 아무것도 없지 않고 무언가 있다는 것은, 그저 매우 높은 확률의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 즉 엔트로피의 법칙이 적용되고 있다는 것에 불과하다.
3. 이제 이러한 가능세계적 논리를 카뮈의 질문에 대한 대답에 적용해보자.
"모든 것이 가능하다"라는 전제를 여기서는 "모든 것은 허용되어 있다"라는 도스토옙스키 식의 명제로 바꾸어보자.
모든 것이 허용되어 있다면 자살하는 것은 당연히 허용되어 있다. 반면, 자살하는 것만 허용된 게 아니라 자살하지 않는 것도 허용된다. 사태를 단순화하여 두 경우만 가능하다고 볼 때, 각각의 확률을 50%라고 한다면, 인류 최초의 모집단은 자살하는 사람과 자살하지 않는 사람으로 반씩 나뉘게 된다. 자살하는 사람은 사라질 것이고, 자살하지 않는 사람은 살아남을 것이다. 그리고 자살한 사람들의 후손보다는 자살하지 않는 사람들의 후손이 더 많을 것이고, 따라서 세대를 거칠수록 유전적으로 자살하려는 사람은 점점 소수가 될 수밖에 없다. OECD 최고 자살율을 자랑하는 한국의 자살율은 10만 명당 40명, 즉 0.04%에 불과하다(게다가 이들 대부분은 카뮈 식 허무주의 때문에 자살한 게 아니라 생활의 고통 때문에 자살한 것이다).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현혹되지 않는 유전자들이 더 많기 때문에 살고 있을 사람이 많은 것이지, 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꼭 살아야 한다는 당위는 없다. 죽을 사람은 죽으면 된다. 거꾸로 꼭 죽어야 한다는 당위도 없기 때문에 살 사람은 살면 된다.
사태를 좀더 정교하게 살펴보자. 왜 자살할 수 있는데도, 살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이 성립한다면, 거꾸로 왜 살 수 있는데도 자살해야 하는가라는 질문도 성립한다. 또한 아무런 질문도 던지지 않는 선택도 허용된다. 카뮈의 질문 왜 꼭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대답은 없다. 모든 것은 허용되어 있으니까 자살할 사람은 자살하면 된다. 반면 자살하는 것만 허용된 것이 아니라 자살하지 않는 것도 허용되며, 심지어 자살하는 사람을 막는 것도 허용되어 있다. 게다가 자살 따위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 삶도 허용된다. 이 경우는 자살의 초기값이 논리적으로 볼 때 1/4이라는 확률로 시작한다. 이 게임이 세대를 거쳐 반복되면 자살하는 사람의 유전자는 처음에 1/4로 시작했더라도 후손을 남기지 못해 점차 비중이 작아진다.
이 모든 사태들의 중첩적 교호 작용을 통해 자살하는 사람도 가끔 있고, 자살하려다 포기한 사람도 좀 있고, 그런 생각은 해본 적도 없는 사람도 있고, 그저 별 생각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다수인 이러한 세계가 나타난 것이다. 논리적으로 보아 각자가 각각의 경우에 동일한 확률로 선택한다 해도 자살하는 사람의 수는 소수일 수밖에 없고, 그들은 자살 유전자를 많이 퍼트리기 힘들기 때문에 어지간한 환경에서는 자살하지 않는 사람이 더 많아지게 되는 필연적 경향이 생겨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자살하는 세계가 있다고 하자. 그 세계는 사람을 전혀 포함하지 않을 것이다. 어딘가에 인류가 탄생했으나 모두가 카뮈식 허무주의자라서 얼마 안 있다 멸종한 세계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세계가 나타날 확률은 그렇지 않은 세계가 나타날 확률보다 월등히 낮다. "왜 자살할 수 있는데도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대답은 하고 싶은대로 만들어 붙이면 그만이고, 아무리 자살하라고 장려한다 해도 지금으로선 죽을 사람의 비율이 그리 높지 않은 유전자 풀이 만들어진 것이다.
즉 자연법칙은 카뮈가 자살하는 것을 막지 않으며, 윤리적으로도 자살을 허용하는 논리가 가능하다. 하지만 또한 윤리적으로 자살을 막는 논리도 가능하며(자살하면 지옥에 간다는 둥...), 삶의 궁극적 의미에 대한 질문 없이 그냥 살아가는 것도 가능하다. 어떤 이유를 갖다대도 논리적으로는 자살로 가는 하나의 경우(허무주의)와 살아남는 다수의 경우로 귀결된다. 어떠한 경로를 거쳐도 강은 바다로 가는 것처럼 통계적으로 그렇게 가게 되어 있다. 자살을 선택한 사람들은 이미 다 죽었고, 우리는 대부분 자살을 선택하지 않는 사람들의 후예다. 따라서 자살할 가능성보다는 자살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은 진화적 경향이 있다.
4. 물론 카뮈가 묻는 것은 이러한 가능세계론에 입각한 총체적인 결과 분석이 아니라 나 개인이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논리적으로 대라는 요구이다. 이런 태도는 마치 생각없이 그냥 사는 것을 꾸짖으며 의식적 반성을 통해 살아가는 이유를 획득하겠다는 주체적 태도처럼 보이지만, 본질에 있어 응석부리기다. 내가 살아갈 이유를 신 또는 우주가 제시해주면 살아줄게, 이런 거다. 사탕을 주면 밥을 먹겠다는 어린애의 떼쓰기 비슷하다.
또한 "살아갈 이유가 없다"는 명제가 참이라 하더라도 이 전제로부터 자살해야 한다는 결론이 도출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그냥'이라는 대답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너 왜 전화걸었어?"라는 질문에 이유없이 "그냥"이라는 답이 가능하다. 전화를 건 이유가 없이도 전화를 걸 수 있다. 살아가야할 이유가 없어도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아가야 할 이유가 없이 잘 살고 있다.
왜 자살할 수 있는데도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대답은 각자가 갖은 논리를 근거로 (무논리를 포함하여) 주관적으로 만들어 내는데, 객관적으로 나타난 것은 현재의 인류의 성향 분포와 같다. 모든 것이 허용되어 있는 초기 상태에서 시작했는데, 게임이 반복되면서 어떤 것은 일어나는 경우의 수가 많고, 어떤 것은 적게 된다. 그리하여 어떤 것은 좀더 허용되어 있고, 다른 것은 덜 허용되어 있는 상황이 되고 만다. 이런 현상은 그저 일어날 확률이 높은 사건은 자주 일어나고, 일어날 확률이 적은 사건은 드물게 일어난다는 엔트로피의 법칙과 같은 동어반복적 현상임을 깨닫게 된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서, "왜 아무것도 없지 않고 무언가 있는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는 무언가 있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라고 답할 수 있는 것처럼, "왜 자살할 수도 있는데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자살하려는 사람은 이미 거의 자살했고, 살려는 성향이 강한 사람들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이 초두에서 두 질문의 패턴이 동일하다고 말한 이유다. 카뮈의 질문에 구구절절히 대답할 필요 없이 죽을 사람은 죽어도 된다고 대답한다 한들 현재의 자살율에서 큰 변동 없이 낮게 유지될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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