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가들이 말하듯, "죽기 전에 죽는다면 죽을 때 죽지 않을 것이다." 달리 말해, 만약 바로 지금 분리된 자아의 감각을 버리고 대신 전체로서 완전한 온우주인 참나를 발견한다면, 이 특정한 심신의 죽음은 단지 우리 자신인 영원한 나무에서 나뭇잎 하나가 떨어지는 것에 불과하다.
명상은 그 죽음을 무한한 주시자 안에 안식함으로써, 그리고 대상으로 보일 수 있는 유인하고 객체적인 필멸의 자아와 탈동일시함으로써 바로 지금 연습하는 것이다. 순수한 공 안에서, 광대한 불생자 안에서는 죽음이란 없다. 시간 속에서 영원히 살기 때문이 아니라(영원히 살지는 않을 것이다), 애당초 시간의 흐름 속으로 결코 들어가지 않는 이 영원한 순간의 무한함을 발견하기 때문에, 비어 있는 주시자로서 자유롭게 서서 광대한 불생자 안에서 안식할 때 죽음은 어떤 본질적인 것도 변화시키지 않는다.
<<켄 윌버의 일기>> p. 400
영혼 불멸을 주장하는 신비주의자들의 상투적인 주장은 이승에서의 삶은 환영이며 우리가 태어나서 자라고 늙어서 죽는 것은 진실이 아니라 망상이라는 것이다. 영혼 차원보다 범위를 확장해서 파르메니데스처럼 만물의 변화 자체를 부정하고 세계가 불변의 일자(一者)라고 보는 이들도 있다. 일견 황당하게 여겨지는 이런 주장들이 어떻게 논리적으로, 경험적으로 가능할까? 켄 윌버에 따르면 최상위 수준에서 깨달은 사람은 인류 역사상 몇 십명이 되지 않는다. 영혼 불멸을 경험적으로 깨달은 사람의 숫자가 수십 명이라면, 깨달은 수십 명과 깨닫지 못한 수백억 사이의 대화는 원초적으로 불가능하다. 대화는 생활양식의 공유, 체험의 공유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이러한 체험적, 생활양식적 공유가 전제되지 않은 의사소통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켄 윌버는 합리적 수준을 넘어서야 이를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합리를 넘어서면 그때부턴 진짜인지, 사기인지, 혹은 망상인지 판별할 기준이 없어진다.
내 나름대로 영혼 불멸에 대해 논리적인 모순 없이, 신비주의를 걷어내고 합리적으로 설명 가능한 모형을 생각해봤다.
위 그림에서 영혼을 하늘색의 3차원 구(球)라고 가정해보자. 그리고 이 세계를 2차원 평면이라고 상정해보자.(=3차원 구를 실체라고 하고, 2차원 평면을 현상계로 보아도 좋다) 그러면 우리의 삶은 3차원 구라는 실체가 위에서 아래로 이동하면서 2차원 평면을 통과하는 과정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통과의 과정에서 2차원의 평면에 그려지는, 구와 평면이 교차하는 접면의 면적의 변화가 우리의 의식 속에서 체험되는 삶의 궤적이 된다. 이를 단계별로 구별하면:
3차원 구의 맨 아랫 부분(=남극)이 처음 평면에 닿는 순간(빨간 점)이 2차원 면의 관점(우리의 의식)에서는 탄생으로 나타난다. 3차원 구 자체는 원래부터 존재하던 것이므로 실제로 탄생한 것은 아니지만(스스로 그렇게 3차원 구로 존재할 뿐이다), 2차원 평면의 현상계에서는 기존에 존재하지 않던 생명이 처음으로 생겨난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시간이 갈수록 구가 아래로 이동하면서 구와 평면이 교차하는 면적이 점점 커진다. 이것이 성장의 과정으로 나타난다. 이 성장은 구의 절반(=적도)에 이르렀을 때 가장 큰 원이 평면에 그려지면서 정점에 이르고, 적도를 지나가면 점점 교차하는 원의 크기가 작아지면서 쇠퇴한다. 그러다가 구의 위쪽 끝(=북극)이 평면에 닿는 순간(빨간 점)에 죽어서 사라지는 것으로 보인다.
2차원 평면의 세계(우리의 경험 세계)에서 보면 이 과정이 사람이 탄생해서 성장하고 쇠퇴하다가 죽는 변화의 흐름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3차원 구 자체의 관점에서 보면 본래 모습(영혼이든, 실체든, 자아든)은 3차원 구의 형태를 유지하면서 변하지 않는다. 이미 완전한 구의 형태로 결정되어 있어, 파르메니데스가 말한 것처럼 불변의 일자로 존재할 뿐이다. 그것이 2차원 평면을 통과하면서 생로병사의 변화로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의 영혼(또는 실체, 본체, 자아)은 마치 이미 찍어놓은 영화의 필름처럼 3차원 실체로서 불변이고 무시간적이며, 우리의 삶은 이 3차원 필름을 2차원 평면에서 시간적으로 풀어내면서 상영하는 것과 유사하다.
이 2차원 평면은 현재라는 시간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우리의 인식이 진행되는 주체로도 해석할 수 있다. 어쩌면 이 둘을 합쳐서 주체의 시간 의식이라고 볼 수도 있다. (평면을 시간으로 해석할 때 평면의 아래 부분은 과거가 되고, 평면의 윗 부분은 미래가 된다.) 3차원 구는 우리 삶 전체를 구성하는 사건들의 전체 집합이다.
이렇게 우리의 삶 전체를 하나의 영화처럼 완결된 사건들의 집합으로 보는 해석이라면 영혼 자체는 불변한다는 주장이 논리적으로 성립할 수 있다. 3차원 구는 본질계, 물자체이고 2차원 평면은 우리의 인식에 나타나는 현상계다. 이 모델이 참이라면 영혼이 불변한다는 주장이나 세계가 불변한다는 주장이 참일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이 모델의 진실성을 어떻게 검증할 것인가. 켄 윌버 식으로는 명상을 통해 깨달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깨달은 사람은 수십 명이란다. 지금까지 살다가 죽은 인류의 총수가 1천억명인데, 이 가운데 깨달은 사람은 겨우 수십 명이다. 이들의 주관적 체험이 사실인지 망상인지 검증할 방법이 없다. 1천억분의 수십의 비율이라면 정상인 대 정신병자의 비율만도 못한 것이다. 깨달은 사람이 훨씬 더 많아져야만 검증 혹은 반증이 가능할 것이다.
켄 윌버의 일기
- 저자
- KEN WILBER 지음
- 출판사
- 학지사 | 2010-01-10 출간
- 카테고리
- 인문
- 책소개
- 『켄 윌버의 일기』은 통합적 영성의 탐구자 켄 윌버의 개인적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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