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문제의 해결은 이 문제의 사라짐에서 감지된다. Die Loesung des Problems des Lebens merkt man am Verschwinden dieses Problems.

그러나 삶의 문제가 끝나도록 사는 것이 가능할까? 시간 속에 살지 않고 영원 속에 사는 것이 가능할까? Kann man aber so leben, dass das Leben aufhoert, problematisch zu sein? Dass man im Ewigen lebt und nicht in der Zeit?

이것이 오랜 동안의 회의 끝에 삶의 의미가 분명하게 된 사람들이, 그 의미가 어디 있는지 말하지 못하는 이유가 아닐까? Ist nicht dies der Grund, warum Menschen, denen der Sinn des Lebens nach langen Zweifeln klar wurde, warum diese dann nicht sagen konnten, worin dieser Sinn bestand

(1916.7.6-7.7, Notebooks 1914-1916, p. 74)


만일 우리가 영원을 시간의 무한한 지속으로 이해하지 않고 무시간성으로 이해한다면, 현재 속에 사는 사람은 영원히 사는 것이다. Wenn man unter Ewigkeit nicht unendliche Zeitdauer, sondern unzeitlichkeit versteht, dann lebt der ewig, der in der Gegenwart lebt. (1916.7.8., NB 74-75)


인생의 문제의 해결은 이 문제의 사라짐에서 감지된다.

(이것이 오랜 동안의 회의 끝에 삶의 의미가 분명하게 된 사람들이, 그 의미가 어디 있는지 말하지 못하는 이유가 아닐까?)

(논고 6.521)


만일 우리가 영원을 시간의 무한한 지속으로 이해하지 않고 무시간성으로 이해한다면, 현재 속에 사는 사람은 영원히 사는 것이다. (논고 6.4311)


1916년, 1차대전 중에 기록한 노트와 1922년 출간된 <<논고>>에 실제로 발표한 부분을 비교해보면 재미있는 게 눈에 뜨인다. 노트북 16년 7월 6일자에서 확신을 가지지 못한 채 기술된 두번째 문장의 의문문은, 이틀 후인 7월 8일자에서는 가정법 형태로 바뀌어서, 그러니까 미심쩍음을 약간 희석하는 방식으로 제시되었고, 이것이 논고(6.4311)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그리고 세번째 문장은 여전히 불확실한 의문문 형태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단정적 표현으로 유명한 <<논고>>에서 유일하게 단정짓지 않고 가정법과, 의문형 표현으로 쓰인 부분이다.


이것은 이 착상을 한 1916년에서 <<논고>>가 발표된 1922년까지 비트겐슈타인 스스로 삶의 의미가 분명해진 것이 아니라, 단지 그런 식으로 삶의 의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추정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불교로 치면 아직 깨달음을 득한 상태가 아니며, 기독교로 치면 '신비 체험'을 한 상태는 아니라는 점이다. 1922년 무렵에 여전히 자살을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볼 때도, 비트겐슈타인 자신은 <<논고>>에서 표방한 것처럼 삶의 문제를 '해소'하지는 못했던 셈이다.

Posted by 깊은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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