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의미는 누군가에게는 단지 지적 호기심의 대상이 아니라 살아가는 힘일 수 있다. 예를 들어 빅토르 프랑클 같은 사람. 어쩌면 의미라는 것은 현대 생활에서 필요하게 된 새로운 에너지원일지도 모른다. 어떤 이는 행복이나 쾌락만으로도 살아갈 수 있고, 다른 이는 돈이나 사랑, 또 다른 이는 책임감을 에너지원으로 삼을 수 있겠지만, 19세기 이후 인류 가운데 일부는 의미라는 새로운 에너지원을 필요로 하게 된 게 아닐까 생각된다. 마치 증기기관은 석탄으로 가고, 승용차는 가솔린으로 가는데, 첨단 차량은 전기나 수소, 태양열 등 신에너지원으로 가는 것처럼, 현대인 중 일부는 신이나 행복 같은 전통적 에너지원이 아닌 삶의 의미라는 신연료를 필요로 하는 것처럼 보인다. (전근대적 인간은 굳이 의미가 필요하지 않은 것 같다.)
물론 의미는 아직 삶의 에너지원이라고 부르기에는 시기상조일지도 모른다. 그저 의미가 삶의 에너지원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추정하고 시도해보는 단계인 듯하다. 카뮈 같은 실존주의적 허무주의자들은 의미의 가능성을 부정한다. 이걸로도 안되고 저걸로도 안되는 상황에서 의미는 어떨까 하고 생각해보는 단계 정도가 맞는 것 같다.
그런데 왜 현대에 와서 굳이 삶의 의미라는 것을 모색하게 되었을까? 논리적으로 따져보면 과학의 발달로 인한 종교의 쇠퇴가 가장 큰 요인인 듯하다. 신의 존재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삶의 의미라는 질문이 제기되지 않는다. 즉, 그들에게는 삶의 의미가 신인 것이 아니라, 삶의 의미라는 질문 자체가 제기되지 않는다고 봐야 한다. 무신론이 등장한 연후에야 삶의 의미라는 질문이 유효하게 제기된다.
삶의 의미는 정답을 요구하는 질문이라기보다는 살아가는 이유에 대한 근원적 프레임에 가깝다. 가장 커다란 가치 기준 같은 것이다. 과학의 발전과정에서 신의 존재로부터의 도덕명령의 도출이라는 존재와 당위의 형식이 폐기되고, 과학적 사실로부터 가치의 도출이라는 새로운 형식을 요구할 때, 존재와 가치를 포괄하는 개념(원인+목적)인 의미를 요구하게 된 것이다. 신이라는 전근대적 가치 체계가 붕괴되면서 삶의 의미라는 이름의 현대적 가치 프레임의 필요성이 대두된 것이 아닐까 추정한다. 물론 아직 삶의 의미는 새로운 가치 프레임으로 전폭적으로 인정받지는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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