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이로운 것은 세계가 어떠하다는 게 아니라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라는 <<논고>>의 주장을 비트겐슈타인은 <<탐구>>에서는 뒤집어서 표현한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사물의 측면들은 숨겨져 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단순하고 친근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것을 알아챌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항상 우리 눈앞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탐구에서 진정으로 근원적인 것은 우리에게 전혀 인상적이지 않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일단 그것을 한번 본 다음에는, 가장 놀랍고 가장 강력한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PI: 129)


비트겐슈타인의 '존재에 대한 경이'를 다루고 있는 논문들을 몇 편 봤는데 신통하지 않다. 비트겐슈타인의 전거 내에서 일관성 있게 요약 정리만 하거나, 별 영양가 없이 쇼펜하우어나 하이데거나 키르케고르가 한 말과 유사성을 비교한다든지 하는 데 머무를 뿐, 부가가치가 있는 사유를 덧붙인 것이 없다. 비트겐슈타인의 사유 자체가 원초적으로 2단계의 사유에 머물러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1단계는 어린아이처럼 세계가 어떠하다는 것이 진기한 상황이다. 움직이지 않는 것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인식하는 어떤 포식자처럼, 보통 사람들은 사물이 어떠하다는 데 신기함을 느낄 뿐 세계의 존재 자체에 대해 경이감을 느끼지는 않는다. 슈뢰딩거가 말했듯, 의식은 새롭고 변화하는 것에 관심을 가지도록 진화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반복 경험된 것은 자명한 것으로, 무의식으로 가라앉는다.


2단계는 존재 자체에 대한 경이를 느끼는 철학적 단계이다. 왜 아무것도 없지 않고 뭔가 있는가를 묻는 라이프니츠 혹은 하이데거 식 질문을 하는 단계이다. 자명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경이롭게, 혹은 낯설게 느껴지는 단계이다. 2단계의 변형으로는 카뮈 식으로 존재에 대해 부조리를 느끼는 허무주의가 있다. 존재에 대한 경이감과 부조리감은 실은 같은 단계에 있으면서 서로 다르게 반응하는 것이다.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놀랍거나 궁극적으로는 허무하다는 깨달음의 단계이다. 대부분의 논의가 이 단계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3단계가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 단계를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다. 그는 이 단계에 도달하지 못했거나, 혹은 이 단계에 도달하기 전에 다른 관심사로 옮겨간 건지도 모르겠다. 3단계는 세계가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든 그저 그러할 뿐이라고 바라보는 관점이다. 경이로우면 경이로운 대로, 부조리하면 부조리한 대로 받아들이는 관점이다. 우주가 니체가 말한 대로 영겁회귀하든, 열죽음으로 무의 상태로 소멸되든, 감정적으로 개입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관점이다. 이 관점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존재와 무를 단지 대립하는 것으로 보지 않고 양자를 통일하는 더 높은 상태에 대한 개념을 득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노직의 말을 따라 유대식 개념인 Ein Sof라고 할 수도 있고, 노자를 따라 도 혹은 묘라고 할 수도 있고, 양상논리학을 따라 가능성이라고 할 수도 있다. (심지어 비트겐슈타인을 따라 신비라고 부를 수도 있다. 물론 이때의 신비는 비트겐슈타인의 주장과는 달리 존재 자체를 가리키지는 않는다. 존재를 하나의 부분 집합으로 삼는 더 커다란 어떤 것을 말한다.) 불교에서 쓰는 공이라는 말도 있으나, 그것은 무와 가깝다는 혼란을 주는 약점이 있다. 아무튼 그것은 존재할 수도 있고,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 어떤 것이다. 그 관점에 따르면 존재한다는 것은, 존재할 수도 있고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 더 높은 어떤 것, 또는 더 넓은 어떤 것의 한 양태가 나타난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존재 자체가 신비하다는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은 해소된다. 왜냐하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 역시 "세계가 어떠하다의 한 형태"에 불과한 것으로 판명되기 때문이다. 즉,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가장 궁극적인 단계는 아니며, 더 넓은 개념인 Ein Sof, 도, 혹은 묘, 신비, 라는 주사위가 던져졌을 때 나타날 수 있는 하나의 경우의 수라는 깨달음 속에서 존재 자체는 더 이상 신비하거나 경이롭지 않은, 담담한 어떤 것으로 나타난다.


“Aesthetically, the miracle is that the world exists. That what exists does exist.” (Notebooks, 1916.10.20.)


존재 자체가 기적이라는 것은 세계가 존재할 확률이 매우 낮은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존재한다는 인식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Ein Sof, 가능성, 도 혹은 묘, 등의 관점에서 볼 때 무언가 존재할 가능성은 기적이라 부를 만큼 낮은 게 아니다. 논리적으로 보면 존재할 확률과 존재하지 않을 확률은 50 대 50이다. 동전을 던져서 어느 한 쪽면이 나올 확률과 같다. 동전을 던졌을 때 앞면이 나온 것을 보고 우리는 경이를 느끼지 않는다.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은 존재할 수 있었던 가능성이 현실화된 것이라고 보는 관점에서는 더 이상 기적이란 없다.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은 그저 그러할 뿐인 어떤 것, 담담하게 바라볼 수 있는 어떤 사건일 뿐이다.


더구나 최근의 물리학에서는 무라는 것을 깨지기 쉬운 불안정한 대칭 상태로 보는 것 같은데, 이 경우 세계가 없을 가능성은 매우 작고 세계가 존재할 가능성은 매우 크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은 전혀 기적이 아니며, 오히려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 게 기적이 된다. 신비로운 것은 세계가 어떠하다는 것도 아니고,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도 아니며,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 경우가 실제로 일어나는 것이다.

Posted by 깊은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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