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허무하다는 것은 약간 모자란 사람들 빼놓고는 누구나 아는 사실인데, 마치 엄청난 새로운 발견을 한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게 카뮈다. 물론 누구나 스무살 무렵에는 그럴 수 있다. 그 무렵에는 허무주의가 마치 궁극의 진리라도 되는 양 생각되는 게 사실이니까.

 

80년대까지는 카뮈의 허무주의가 쿨해 보였는데, 오늘날은 시대착오적으로 보인다. 허무의 과잉은 이제 촌스럽다. 허무에 대한 영웅적 반항이니 하는 것도 오바가 심한 것이다. 그래서 90년대부터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왕년에 카뮈가 차지하고 있던 자리를 꿰차게 된 것 같다. 물론 카뮈에 비해 하루키는 깊이가 없다. 포장지만 세련된 조미료 범벅의 인스턴트 식품을 먹는 기분이 든다. 하지만 그것이 하루키의 잘못이겠는가. 그저 시대가 가벼운 탓이겠지. 베토벤과 슈베르트의 초상화가 걸려 있던 자리에 러셀과 아인슈타인의 초상화가 걸려 있는 것을 보고 비트겐슈타인이 느꼈다던 '인간 정신의 무서운 타락'은 카뮈의 초상화가 걸려 있던 자리에 하루키의 초상화가 걸려 있는 것을 보고 느끼는 '시대의 무서운 타락'에 비하면 아이들 소꿉놀이처럼 느껴지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의 의미의 사상사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하루키가 아니라 카뮈다. 삶의 의미를 다룬 영미철학계의 논문을 보면 열에 여덟은 카뮈를 언급하고 있다. 카뮈가 인생의 의미라는 철학적 담론에서 흔적을 남기게 된 것은 《이방인》 때문이 아니라 《시지프 신화》 때문이다. 특히 그 책의 첫번째 문장, 즉 자살이야말로 가장 긴급한 철학의 문제라는 전혀 '비철학적인' 언급 때문에 그러하다. 삶의 의미 담론에서 카뮈의 기여는  삶의 허무를 새롭게 발견했다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삶의 허무성에 대해 시지프스라는 기가 막힌 비유를 창안했다는 데 있다. 물론 이것은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것처럼 단지 좋은 비유가 이해를 신선하게 해주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고, 삶의 의미에 대해 원형적 사유를 가능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Posted by 깊은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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