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쉽게 하찮은 존재로 치부하는 벌레들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는 무얼까? 벌레가 왜 사는지는 사람들의 관점에서는 잘 포착되지 않는데, 리처드 테일러의 동굴벌레 사례를 검토한 <<굿바이 카뮈>>를 재인용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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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에 아주 깊고 어두운 동굴이 있다. 바닥은 늪지로 되어 있고 벽과 천장은 부드러운 빛으로 덮여 있다. 놀라움 속에서 이 동굴의 고요함을 보고 있자면, 창조주가 천국을 소우주의 모습으로 복제해 놓은 게 아닌가 여겨질 정도다.
그런데 좀더 다가가서 살펴보면 다른 상황이 밝혀진다. 각각의 빛나는 점들은 사실은 추하게 생긴 벌레들이다. 꼬리에서 빛을 발산하여 먹이감이 될 곤충들을 유인하는 것이다. 곤충이 걸리면 끈적끈적한 실을 뿜어내 얽히게 만든 다음 잡아 먹는다. 이러한 과정은 몇 달이고 계속되는데, 이 눈먼 벌레들은 무시무시한 침묵 속에서 가금씩 잡히는 영양분들을 포획하여 다음 먹이를 잡을 때까지 생존하기 위해 벽에 붙어 있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는 걸까? 어떤 위대한 결말이 이 오래된 반복적인 노력의 끝에서 기다리고 있기에 그것을 가치 있게 만드는 걸까?
아무것도 없다. 유충은 단지 변태를 거쳐 조그만 날개를 가진 성충으로 바뀌는데, 이 녀석은 먹을 입도 없이 고작 하루나 이틀을 살다 죽는다. 이 성충은 짝을 짓고 알을 낳자마자 동료 벌레들의 실에 얽혀서 잡아 먹히고 만다. … 이러한 과정이 수백만 년간 지속되어 왔다. 그리고 똑같이 무의미한 순환이 앞으로도 수백만 년간 끝도 없이 지속될 것이다.
동굴 벌레의 끈적끈적하고 눅눅한 삶에서는 뜨거운 태양 아래 얼굴을 찡그리고 팽팽해진 근육으로 바위를 밀어 올리는 시지프스의 모습에서 보이는 ‘영화처럼’ 드라마틱한 고통의 장면은 빠져 있다. 하지만 수백만 년을 햇볕도 보지 못한 채 별다른 가치 있는 목적도 없이, 오직 먹고 싸고 번식하기 위해 어둠과 침묵 속에서 똑같은 일을 똑같은 모습으로 소리도 없이 꿈틀꿈틀 반복하는 동굴 벌레의 삶은 어떤 면에서 시지프스의 고역보다 오히려 더 비루하고 끔찍해 보이는 측면이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동굴 벌레의 삶이 별난 경우가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동굴 벌레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가 본질적으로는 동일한 광경을 연출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17년을 어두운 땅굴 속에서 유충으로 보낸 후 지상으로 나와 며칠 만을 살다가 알을 낳고 죽어가는 매미의 경우를 보자. 이 매미의 알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땅속에서 다시 17년을 보내고 똑같은 삶과 죽음을 예정된 코스대로 반복해야 한다. 이 한없이 무의미에 가까워 보이는 탄생(혹은 삶)과 죽음의 순환이 세대를 이어가며 영원히 지속된다. 도대체 무슨 영광이 있길래? 먼 바다에 나갔다가 갖은 고생 끝에 태어난 곳으로 돌아와 단지 자신과 똑같은 사이클을 반복하는 것밖에 다른 목적은 전혀 없어 보이는 후손들을 낳고 죽어 가는 연어의 일생은 또 어떠한가? 해마다 힘겹게 지구를 한 바퀴씩 돌아 여행하는 것 외에는 별 다른 목적이 없어 보이는 삶을 후손들에게 끊임 없이, 끊임 없이, 끊임 없이 뒤따르게 만들 뿐인 철새들의 고단한 삶에는 무슨 원대한 사연이 있는 것일까?
우리는 이 모든 것의 목적과 의미가 무엇인지, 이 수백만 년 동안 반복되어 온 끊임없는 노력이 궁극적으로 어떤 영광을 가져오는 것인지 의아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하고, 어떠한 종착점에도 닿지 못하면서 왜 그것이 계속 되어야 하는지 말이다. 우리는 이 모든 것에는 전혀 목적이 없으며, 이 모든 노력이 아무런 성취도 얻지 못한다는 것, 그리고 숱한 노고로 가득찬 이 순환이 단지 똑같이 반복될 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 어떤 생명체의 목적도 삶 그 자체 외에는 없다는 것이 명백하다.
삶은 이렇듯 목적도 이유도 없고 다만 누추하다. 이 누추한 삶이 그저 그렇게 지속되는 것이며, 생명은 그 허망한 지속을 위해서 분투할 뿐이다. 외부의 시선에서 봤을 때 이 삶의 결말에는 어떠한 영광도 보이지 않는다. 누추한 삶 그 자체의 영원한 지속만이 유일한 목적인 듯하다. 동물들의 삶의 광경은 시지프스의 삶보다 크게 나아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동물의 삶이 아닌 인간 삶의 모습은 어떠할까? 우리들의 삶에는 벌레나 물고기나 새들과는 다른 어떠한 영광이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우리의 삶 또한 “자신을 먹어치우면서 영원히 무를 향해 달려가는” 동굴 벌레의 삶과 마찬가지로 누추하고 무의미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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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카뮈>>에서는 여러 검토 끝에 외부의 관점에서 보면 하찮게 여겨지지만, 내부의 관점에서 보면 벌레의 삶에도 희로애락이 있다는 식으로 결론을 내린 바 있다. 여기서는 다른 관점에서 보자. 외부의 관점이라기보다는 상부의 관점을 취해 보자.
여기 벌레와 인간이 있다. 우리는 얼핏 인간의 삶이 벌레보다 나아 보인다고 판단한다. 하지만 5억년 전 쯤엔 인간의 조상도 벌레였다. 벌레의 후손 가운데 한 가계가 진화하여 인간이 된 것이다. 생태계 전체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과 벌레 모두 박테리아 우주의 벤처 자회사들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박테리아 우주 이사회의 관점에서 보면 전체 자본금 1000억원 가운데 0.1% 정도를 인류라는 회사에 투자한 것이고 어찌어찌해서 지금까지는 크게 성장해서 잘 나가고 있긴 하지만, 언젠가는 핵전쟁이나 지구온난화 또는 운석 충돌 같은 돌발 악재를 만나 파산할지도 모르는 위험을 안고 있는 상황이다. 이에 리스크 헷징이 필요하다. 인류가 파산했을 때를 대비한 박테리아 이사회의 대응책은? 생물학자 린 마굴리스는 미국 오리너구리가 인간을 대신할 차순위 후보가 아닐까 생각했지만, 나는 동굴벌레나 개미 또는 바퀴벌레도 그 후보 중 하나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1억년 정도의 시간만 투자하면 어떤 생물종도 인류보다 뛰어난 종으로 진화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 진화생물학적 현실이다. 특히 개미나 바퀴벌레는 핵전쟁이나 운석충돌에도 불구하고 생존할 가능성이 크지 않은가. 그렇다면 벌레는 왜 사는가에 대한 답이 나온다. 생태계 전체의 관점에서보면 생명계의 가계를 이어갈 후보 중의 하나로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는 위험을 피하기 위해 따로 담아놓은 리스크 헷징 전략의 일환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한번 짚고 넘어가야 할 사항은 관점이라는 주제다. 벌레의 삶은 인간이라는 외부의 관점에서는 하찮고 무의미하게 보인다. 벌레 자신의 내부의 관점에서는 생로병사, 희로애락의 중요한 삶으로 여겨질 것이다. 그런데 인간과 벌레를 총괄하는 상위의 관점, 즉 박테리아 우주의 관점에서는 하위 부서에 할당한 미션을 수행하는 어떤 존재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굿바이 카뮈>> 초판에서는 내부의 관점과 외부의 관점만을 보았는데, 상부의 관점을 제대로 궁구하지 못한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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