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의미라는 질문은 19세기 유럽에서 등장했는데, 여기에는 과학적 세계관의 확산과 이로 인한 종교적 세계관의 퇴조라는 요인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논리적으로 추론해보면, 삶의 의미 문제는 대체로 죽음에 대한 자의식으로부터 나오는데, 예전에는 죽음의 문제에 대해 신과 내세, 즉 종교가 해답을 주었다. 하지만 과학적 세계관이 신을 부정하고, 우주를 목적없는 물질의 필연적 과정으로 설명했을 때 비-목적론적 세계관에 입각한 인생관이 필요하다. 즉 신없는 세계를 견뎌낼 마음의 힘=새로운 가치관이 필요하다. 새로운 가치관을 세우는 실패했을 때, 허무주의가 나타나는데, 허무주의가 인류 전체를 대표하는 가치관으로서 부적절하기 때문에, 바로 이 허무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 삶의 의미를 계속해서 묻게 된다. 즉 신학적 세계관을 거부했을 때, 1차적으로 허무주의를 맞닥뜨리게 되는데, 허무주의적 가치로는 인류공동체가 안정적으로 존속할 만한 동력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삶의 의미를 계속해서 화두로 삼아 새로운 가치를 모색하게 된다. 따라서 새로운 가치관은 비종교적이면서 + 반허무주의적인 삶의 의미로 나타나야 하는데, 이러한 삶의 의미는 대체로 일과 사랑과 놀이의 영역 같은 현실적 가치 활동 속에서 찾아진다. 즉, 통시적으로 보면 크게 종교적 세계관 다음으로 과학적 세계관이 나타나고, 과학적 세계관에서는 1차적으로 허무주의적 세계관이 나타났다가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현세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DIY(Do-it-yourself)적 삶의 의미가 나타나게 된다. DIY적 삶의 의미로는 '의미가 없다면 네가 만들어라'라고 주장하는 실존주의가 대표적이다.
그러면 왜 '의미'라는 개념이 삶과 조합되게 되었을까? <<Philosophical Explanations>>에서 로버트 노직이 언급한 의미의 의미 8가지 가운데 내가 볼 때 중요한 것은 세가지다. 첫째는 의도와 목적로서의 의미, 둘째는 인과적 지시로서의 의미, 세째는 정서적 중요함(가치)으로서의 의미다.
전통적인 종교적 세계관은 특히 기독교의 경우 목적론적 세계관에 바탕을 둔다. 이때는 삶의 '목적'이라는 개념만으로 충분하다. 따라서 아직까지 삶의 의미라는 개념은 도입될 필요가 없다. 최고의 목적적 존재로서의 신, 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최고선으로서의 행복 정도면 충분하다.
그런데 종교적 세계관의 부정으로 나타난 허무주의는 우주를 목적의식을 가지는 절대자의 창조물로 보지 않고, 맹목적인 물질 운동의 필연적 과정으로 본다. 따라서 삶의 목적 또는 이유 따위는 없고 원인만 있게 된다. 즉 허무주의는 기본적으로 과학적 세계관에 바탕을 두기 때문에 목적론을 배격하고, 인과론을 추구한다. 따라서 여기서는 삶의 '목적'은 존재하지 않고 삶의 기원, 원인 같은 인과적 요인을 따진다. 허무주의에 빠지는 많은 사람들이 우주가 빅뱅에서 출현하여 열죽음으로 소멸한다는 우주론이나, 인간이 신의 창조물이 아니라 맹목적 진화의 산물이라는 생물학 이론에 영향을 받는다. 따라서 허무주의에 대한 비종교적 반박은 목적론적 설명으로는 안 되고, 우주론적, 생물학적 과학적 이론에 바탕을 두어야 했기 때문에 인생의 목적 개념, 즉 의지와 목적을 가진 신적 존재를 넘어서 인과적, 과학적 지식이 필요했다. 그 결과 그 동안 삶의 가치가 목적이라는 개념 하에서 추구되어 왔다면, 이제는 인과적 설명 속에서도 가치가 찾아져야 한다. 따라서 '목적'과 '인과' 둘을 포함하는 '가치' 개념으로서의 '의미'라는 범주가 도입되어야 했다는 것이 나의 가설이다. 여기서 노직의 설명에서 나왔던 삶의 의미의 3대 요소 즉 목적, 원인(인과), 가치가 다 등장한다.
삶의 목적 개념이 폐기되고(?) 삶의 의미 개념이 도입된 이유 중 하나는, 존재와 가치가 의미 속에서 통합되기 때문이다. 삶의 목적이라는 개념으로는 인과적 설명을 내부에 포함할 수 없다. 반면 의미는 목적을 내부의 한 요소로 포함하면서 그것을 넘어서 원인과 가치까지 포괄한다. 줄리언 바지니가 <<빅 퀘스천>>에서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이 단일한 질문이 아니라 복합질문이라고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삶의 의미를 물을 때 어떤 사람은 삶의 목적을 생각하고, 어떤 사람은 과거의 기원을 좇고, 어떤 사람은 현세적인 가치를 따진다. 그래서 삶의 의미를 물을 때 사람들이 무엇을 생각하는지는 항상 애매하게 여겨진다. 많은 사람들이 삶의 의미를 물으면서 이 질문이 삶의 목적을 묻는 질문과 어떻게 다른지 모르는 것도 여기에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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