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에서 말하는 지금 여기에 잘 집중하는 것은 인간보다는 동물일 것이다. 동물처럼 어제를 돌아보고 내일을 걱정할 지능이 미약할 때, 오늘 먹을 것을 구할 수 있고, 오늘밤을 지낼 잠자리만 있으면 살아가는 데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런데 인간처럼 지능이 높아져서 인생 전체를 바라보면서 과거를 회고하고 미래를 예상할 수 있을 때, 삶을 살아가도록 하는 힘은 지금 여기에 있는 대상들만 가지고는 부족하다. 과거가 나를 붙잡고 미래가 나를 불안하게 한다. 현재의 당면 문제만 해결된다고 해서 인생 전체가 해결되지 못한다. 지능이 높아질수록 오히려 마음은 더 많이 흔들리게 된다. 비틀거리면서도 삶을 앞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다른 힘, 먹고 자고 싸는 것 외에 다른 가치 있는 요인이 없으면 높은 지능을 획득한 생명체를 살아가게 만드는 동기가 약해진다. 무명 가수라면 부르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겠지만, 나훈아 급 정도가 되면 이건희가 불러도 안 가는 것과 같다. 어지간히 비싼 값을 치루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는다. 인간 정도로 머리가 크면 신이 동물에게 준 당근만 가지고는 살아갈 동기부여가 안 된다. 그까짓 인생이 무슨 가치가 있느냐고 곧바로 허무주의에 빠지고 만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삶의 의미다. 삶의 의미는 지능이 높은 동물을 살아가게 만드는 힘이다.
이러한 경향은 사회 전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역사적으로는 사회 전체의 지능이 높아졌을 때, 특히 산업혁명 이후 서구에서 삶의 의미에 대한 고민이 본격적으로 나타났다. 그 전에는 예민한 철학적 개인들의 증후였을 뿐이다.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은 인생에 대해 납득할 수 있는 설명을 요구하는 것이다. 누가 당신에게 이해가 안 되는 명령을 내렸다 하자. 예컨대 하루 종일 광화문 광장에서 벌거벗고 춤추며 서 있으라고. 그러면 당신은 그 명령에 따르겠는가? 명령이 납득이 안 되므로 따르지 않을 것이다. 왜 벌거벗고 춤추라고 하는 거죠?라고 물을 것이다.
우리는 삶의 의미 문제에 부딪히기 전에는 납득을 요구한 적 없는 삶을 살아온 것이다. 인간의 삶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때 비로소 인생이 납득이 안 되는 명령이라는 것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도대체 왜 살라고 하는 거죠? 먹고 싸고 자는 게 삶이라고요? 그러니 그냥 살으라고요? 싫은데? 차라리 권총으로 머리통을 날려버리는 게 낫겠군요. 탕~ 이렇게 된다. 납득되지 않으므로 삶은 무의미하게 여겨진다.
삶의 의미는 살아갈 이유를 납득이 되게 만들고 싶다는 마음의 표현이다. 물리적이든, 생물학적이든, 윤리적이든, 종교적이든, 살아갈 이유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는 것이다. 심리학자 앨리슨 고프닉에 따르면 납득할 수 있는 설명은 두뇌에 쾌감을 주는데, 이는 진화적 적응성과 관계된다. 사물이 왜 그런 방식으로 작동하는지를 아는 것은 환경과 미래에 대한 적응력을 높이는데, 이를 강화하기 위해 인과적 지식을 얻게 되었을 때 (즉, 납득되는 설명을 얻었을 때) 두뇌는 쾌감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마음을 간질이던 문제를 해결했을 때 "유레카"를 외쳤던 아르키메데스를 떠올려보면 알 수 있다. 설명에는 쾌감이 따르기 때문에 습득할 지식이 많은 아이들은 끊임없이 질문 공세를 퍼부어댄다. 더 이상의 지식이 필요 없는 노년기가 되면 설명에 대한 욕구가 감소하게 된다.
진화론적으로 설명의 효용은 납득에 있지 진리에 있지 않다는 점이 핵심 포인트다. 삶의 의미에 대한 의문 역시 납득할 수 있는 설명을 요구하는 것이지, 반드시 진리인 설명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섹스의 쾌감이 반드시 생식의 성공에 의존하지 않는 것처럼, 설명의 쾌감을 얻기 위해서는 문제를 풀었다고 믿기만 하면 된다. 사이비 설명이 아무런 설명도 없는 것보다는 견딜만하다(앨리슨 고프닉 논문, <<종교본능>>에서 재인용).
이러한 도식에 따르면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은 우리가 가진 '인과적 설명에 대한 욕구'에서 파생되는 범주오류가 된다. 성욕이 어떠한 지식에 관계되는 것이 아니듯, 삶의 의미에 대한 의문도 인과적 설명을 요구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지식에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설명의 쾌감을 얻기 위한 '욕구'가 그 본질이다. 즉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은 참인 대답을 통해 해결되는 것이 하니라, 납득할 만한 설명을 통해 욕구가 해소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삶의 의미의 진화적 효용성은 무엇인가? 왜 사는지 이유를 아는 사람은 어떠한 고난도 이겨낼 수 있다는 니체의 가설 또는 빅토르 프랑클의 로고테라피의 가설이 그 한 대답일 것이다(삶의 고난을 이겨낸다는 것이 바로 생존가능성을 높인다는 말이므로). 그리고 왜 사는지 안다는 것, 즉 삶의 의미에 대한 납득할 수 있는 설명을 얻는다는 것은 진리 여부와는 필연적 관계는 없을 수 있다. 삶의 의미는 진리의 문제가 아니라 납득의 문제다(물론 진리가 아니라면 납득이 안 될 거라고 믿는 사람도 있을 것이지만). 영어로 make sense of it all, 즉 우리가 가진 상식 체계와 맞아 떨어지게 삶의 의미가 '설명'되는 것이 핵심포인트다. 따라서 삶의 의미는 새로운 정보를 얻는 지식이라기 보다는 기존에 알고 있던 것들이 머리속에서 아귀가 맞아 떨어지도록 재배열되는 깨달음에 가까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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