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행복론'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12.07.26 소소한 행복, 어부와 MBA
  2. 2012.06.05 행복은 인생의 목적일까 2 1
  3. 2012.05.29 행복은 인생의 목적인가 1
  4. 2012.04.04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

미국 작가 티모시 페리스가 쓴 <<4시간>>이라는 책에 나왔다는 우화. 큰 사업을 벌여 떼돈을 벌려는 MBA 출신 미국 관광객과 욕심없이 오늘의 작은 것에 만족하는 멕시코 바닷가 마을의 어부 사이의 대화를 읽고, 사람들은 돈과 성공을 위해 아둥바둥 사는 것보다 일상의 소소한 행복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내용.... 이 우화가 자기계발서 작가들 사이에서 꽤 인기 있는 소재였나보다. 인터넷에 보니 여러 버전이 떠다니고 있는데, 대부분의 인용자들의 해석은 이렇다:

멕시코 어부는 하루 서너 시간만 일하면서 오늘 먹을 고기만 잡고, 남은 시간은 빈둥거리며 놀거나 애들과 아내와 노닥거리며 산다. 한마디로 소소한 행복에 만족하며 느리게 산다. 반면 미국 MBA는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오늘을 희생한다. 고기잡이 어선을 여러 척 크게 만들고 공장을 짓고 생선을 가공하여 수출해서 큰 돈을 벌기 위해 하루 24시간이 모자라게 바쁘게 산다. 그런데 이 사업가의 장래 희망이 뭐냐하면 떼돈을 번 다음 은퇴하여 바닷가에 집짓고 가족들과 친구들과 한가로운 여생을 즐기는 것이다. 결국 이 사람이 꿈꾸는 은퇴 후의 행복한 삶의 모습은 가난한 멕시코 어부의 현재의 행복한 삶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사실을 우리가 잊고 산다는 것이다. 이 우화에서는 생략되어 있지만, 지금 여기에서 바로 행복한 삶이 가능한데 아둥바둥 돈벌겠다고 분투하는 MBA 출신 여행자가 어리석고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다고 보는 것 같다.

과연 이것이 사태의 전모일까. 멕시코 어부와 미국 MBA의 삶의 목적은 똑같이 행복으로 수렴하는가. 똑같이 행복이라는 목적을 추구하면서 서로 다른 전략을 취한 것에 불과한 것인가. 그리하여 지금 여기에서 당장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어부는 그것을 실천하고 있고, MBA는 어리석게 그것을 우회하고 있는 것인가. 이러한 해석에 딴지를 걸어보도록 하자.

1. 우화의 논조를 따라 행복을 기준으로 볼 때, 어부는 현명하고 MBA는 어리석은 사람처럼 보인다. 행복이 인생의 유일한 목적이라면 어부가 옳고 MBA는 틀렸다고 볼 수도 있다. 어부는 매일매일 일생에 걸쳐 행복한 데 반해, MBA는 일생의 끝부분에서만 행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다면 행복이라는 삶의 목적은 삶의 총체적 모습을 포착하는 좋은 프레임이 못된다는 결론이 나올 수도 있다.

첫 번째로 지적되어야 할 것은 실제로는 이 둘이 행복이라는 동일한 가치를 추구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멕시코 어부의 삶은 똑같은 날들의 반복이라는 가치의 단순재생산의 형태를 취하고 있고, MBA는 가치의 확대재생산을 추구하고 있다. 비교하자면 전자는 행복 추구이고, 후자는 업적 추구이다. 누가 더 큰 가치를 생산하는가. 멕시코 어부는 날마다 행복할지언정 가족의 생계를 넘어 이루어 놓은 일이 없다. 어부는 공장도 만들지 못했고, 선박도 만들지 못했고, 막대한 고용을 창출하지도 못했다. 나라와 나라를 잇는 물류의 연결망을 건설하지도 못했다. 행복을 기준으로 보면 매일 만족하는 어부의 삶의 더 나을 수 있지만, 성취를 기준으로 보면 MBA처럼 사는 삶이 더 의미 있는 삶을 산 것이다. 삶의 의미는 객관적 가치 생산을 통한 주관적 만족과 이 과정의 확대재생산 속에 있다. 객관적 가치가 없는 주관적 만족으로는 삶의 의미라는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한다. 행복은 주관적 만족은 설명하지만, 객관적 가치를 전제하지 않고도 가능하기 때문에 삶의 총체적 모습을 이해하는 데 한계가 있다.

이 우화는 잊고 있던 소소한 행복의 가치를 일깨운다는 측면은 있지만, 인생 전체를 오직 소소한 행복만을 위한 것으로 퇴행시키는 단점이 있다. 행복하지만 무의미한 삶으로 이끈다. MBA 출신 사업가가 선박을 만들어 어획을 하고 공장에서 가공하여 다른 나라로 수출하는 사업을 하는 궁극적 목적은 멕시코 어부의 현재의 모습과 마찬가지로 은퇴 후에 가족과 친구들과의 평화롭고 한가로운 삶인 것처럼 묘사된다. 동일한 목적을 비효율적 방식으로 달성하려는 어리석은 사람으로 그리고 있다.

하지만 삶의 결과가 같다고 (사실은 같지 않지만, 같다고 치고) 삶의 목적이 애초에 같았던 건 아니다. 일의 결과만을 놓고 보면 뼈빠지게 일하는 혁신의 아이콘인 스티브 잡스도 하루 세끼 먹고, 오늘도 별일 없이 맹물같은 나날을 보내는 당신도 하루 세끼 먹는다. 그러면 둘이 결국 같은 삶의 목적(하루 세끼 먹는 것)을 가진 것인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결국은 똑같이 세끼를 먹는다는 사실이 둘 사이의 목적의 동일성을 증명하지 못하듯, 4시간을 낚시하는 어부나 공장을 돌리는 MBA 사업가나 똑같이 행복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이 둘 사이의 목적의 동일성을 증명하지는 못한다.

사실 MBA는 행복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성취를 추구한 것이고, 그 결과로 나타나는 행복을 원한 것이다. 행복을 1차로 원해서 2차로 일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일을 추구한 결과로 따라오는 행복을 원했다고 보는 것이 맞다. 그리고 누가 더 행복했는가가 아니라 누가 더 큰 가치를 창조했는가가 삶의 의미의 차이를 결정한다. 또한 이 우화에서는 빠져있지만, 선박을 만들고, 공장을 짓고, 수출을 하는 일에서도 단지 결과만을 위한 것이 아닌 과정 자체 속의 성취감이 충분히 가능한 것이다.

2. 다음으로 볼 점은 개인적 시각이 아니라 집단적 관점이다. 개인적 수준에서는 누가 더 행복했는가를 따지는 것도 괜찮을 수 있겠지만, 삶의 의미는 개인적 수준을 넘어 인류 전체의 관점으로 증폭해서 볼 때 더 잘 드러난다. 멕시코 어부와 미국 MBA 개인적 수준을 넘어서 인류 차원에서 볼 때, 원양어선이 있는 세계, 공장이 있는 세계, 큰 배로 대륙과 대륙이 이어진 세계와 그렇지 못한 세계를 비교할 수 있다.

통통배를 타고 하루 서너 시간 일하고 집에서 느긋하게 퍼자는 사람들로만 100% 구성된 인류를 생각해보자. 즉 지구 전체가 멕시코 어부처럼 사는 세계다. 큰 비즈니스도 없다. 사람들은 마을에서 태어나 마을을 벗어나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 지구 대륙에 흩어진 인류는 연결되지 않는다. 인류 차원의 집단 지성은 출현하지 않으며 고립분산된 마을단위의 촌락공동체로 머문다. 인류 전체를 놓고 보면 어느 쪽으로 가야 할까. 전부는 아니더라도 누군가는 공장을 세우고, 원양어선을 만들고, 국제무역을 하는 세상이어야 하지 않을까. 어부로만 구성된 세상, 또는 반대로 사업가로만 구성된 세상이 아니라 어부와 사업가 둘의 삶의 양식이 공존하는 다양성이 있는 세상이어야 하지 않을까. 전체의 관점과 개체의 관점을 종합해서 봐야 한다. 인류가 더 큰 체제로 통합되는 것이 역사의 진행방향이다. 사실 멕시코 어부의 평화로운 삶은 촌락공동체 단위에서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왜 그런가. 마르크스가 말한 토대와 상부구조의 연동 문제가 있다. 이 우화에서 묘사된 멕시코 어부의 그림은 평화로운 촌락공동체를 연상시킨다. 노자의 소국과민 같다. 문제는 다른 나머지 조건(정치, 사회, 문화)은 현대적인데 경제적 태도만 원시적 촌락공동체로 간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작동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연동되어 있다.

원시적 촌락공동체 단위의 경제적 토대 위에서는 민주주의 사상 같은 상부구조가 나타나지 않는다. 원시적 촌락공동체의 삶은 우화에서 묘사된 것처럼 평화로운 바닷가가 아니라 내부의 갈등과 외부로부터의 침략이 적나라한 폭력으로 나타나는 전근대적 삶의 형태를 띤다. 80명 이하의 밴드 소사이어티에서는 조직의 내부와 조직간의 폭력적 갈등 때문에 제명에 죽는 사람의 비율이 오늘날처럼 높지 못하다는 연구가 있다. 원시 촌락공동체보다 발전한 봉건적 촌락공동체 정도에서도 내부적으로는 가혹한 수탈이 존재하고, 외부적으로는 상시적인 침략이 항존하므로 평화로운 멕시코 어부의 삶은 동화속의 장면으로만 가능하다. 국가 단위가 없으므로 외부의 약탈에 쉽게 노출되어 있다. 이런 불편을 피하기 위해 인류는 조직의 사이즈를 키운 것이고, 사이즈가 커지다보니까 결국은 자본주의적 생활 양식이 나타난 것이다. 도시가 발달하고 인구의 사이즈가 증가하지 않는 한 멕시코 어부의 삶은 우화에서처럼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기는 힘들다. 관리에게 수탈당하고, 왜구에게 약탈당하는 조선시대 어민의 불안하고 궁핍한 삶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더 크다.

이처럼 경제적 토대는 사회, 정치, 문화적 상부구조와 연동되어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멕시코 어부와 같은 평화롭고 낭만적 생활양식을 보장한 시스템은 없었다. 낭만적인 멕시코 해안의 평화는 무엇으로 보장되고 있는가. 이 뒤에는 보이지 않는 시스템이 놓여있다. 군대가 해안을 경비하고 있다. 경찰이 마을의 치안을 담당하고 있다. 사회적 분업 속에서 어부는 고기만 잡으면 살 수 있다 등등. 모든 것은 국가시스템을 전제해 놓고 작가는 마을 공동체 속의 한가한 개인을 드러내 놓는다. 이러한 시스템이 없다면 한가한 멕시코 해변은 관리에게 수탈당하고, 왜구에게 약탈당하는 조선시대 어민의 삶이 되어 버린다. 낭만적인 자연상태란 존재하지 않는다. 관리에게 수탈당하지 않으려면 민주주의가 필요하고, 외적의 약탈을 막으려면 강력한 국가권력이 필요하다. 민주주의와 국민국가는 생산력의 발달과 인구증가를 조건으로 한다. 이것은 결국은 MBA식의 경제적 생활양식을 전제하는 것이다. <<4시간>>의 우화는 자본주의적 현실에서 특정한 개인을 칼로 오려내서 낭만적 자연상태라는 역사적 진공 속에 위치시키는 추상적 왜곡에 불과하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서, 어부와 MBA를 개인대 개인으로 놓고 비교해 봐도 어부는 모아둔 돈이 없으므로 아내가 큰 병에라도 걸리면 이를 감당하지 못하므로 작은 행복이 무너지고 만다. 자식이 유학이라고 가겠다고 하면 속수무책이 되어 버릴 것이다. 물론 <<4시간>>의 저자가 이를 몰라서 이런 우화를 만들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소소한 행복을 강조하기 위해 만들어낸 우화를 가지고 너무 진지하게 접근한 감이 있지만, 소소한 행복이 생각만큼 의미있는 삶이 아니라는 점, 대량생산 경제 체제를 토대로 한 국가 시스템을 전제하지 않으면 멕시코 어부의 한가로운 어촌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하고, 자기계발서 작가들이 작위적으로 꾸며낸 설정에 순진하게 속아넘어가는 포스팅이 많은 듯하여 딴지를 걸어보았다.

 


4시간

저자
티모시 페리스 지음
출판사
부키 | 2008-03-12 출간
카테고리
자기계발
책소개
충족한 인생을 살기 위한 라이프스타일 디자인 4단계! 백만장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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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목적과 결과 논증

행복은 인생의 목적이 아니라, 다른 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추구한 결과로서 나타나는 부산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래야 자연스럽다. 안 그러면 객관적 가치가 없는 주관적 관념론으로서의 행복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예를 들어, 배 고픈 사람이 밥을 먹고 배가 부르면 행복을 느낀다. 이 때 이 사람은 행복을 추구한 것일까, 밥을 추구한 것일까? 몸이 필요로 하는 것은 행복이라기 보다는 밥이다. 최소한 1차적으로 필요로 하는 것은 밥이 분명하다. 따라서 행복하기 위하여 밥을 먹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밥을 먹은 결과로 행복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 즉 행복을 추구한 결과로 밥을 먹는 것이 아니라, 밥을 먹은 결과로서 행복한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행복은 상위의 목적이 아니라 성취의 결과로서 수반되는 어떤 것일 수 있다. 행복이 목적이 아니라 어떠한 성취의 결과로서 행복이 수반된다는 것은 심리학자 빅터 프랑클도 지적한 바 있다. 프랑클에 따르면 인간은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다.

행복이 인생의 궁극적 목적이라면 다른 것들을 모두 수단으로 삼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비합리적이며 심지어 기괴하기까지 하다. 행복이 최고의 목적이라면 어떠한 경우에도 반드시 행복해야 하며 불행은 최대한 피해야 할 어떤 것이 된다. 그런데 이 경우 내용없는 행복이 가능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행복 알약이라는 것이 있다고 하자. 어떠한 상황에서도 이 알약을 먹으면 일정 시간 동안 행복을 느낄 수 있게 된다. 그런데 갑자기 부모님이 돌아가셨다고 가정해보자. 이 경우 우리는 엄청난 슬픔 속에서 불행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행복이 인생의 궁극적 목적이라면,  부모가 돌아가셨다고 해서 불행하다고 느껴서는 곤란하다. 빨리 행복 알약을 하나 먹어서 슬픔을 떨쳐버리고 행복감을 느껴야 한다. 그러면 부모가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슬퍼하지 않고 행복한 감정을 느낄 수 있게 된다. 궁극적 목적으로서의 행복을 최악의 상황에서도 이룰 수 있게 된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부모가 죽었는데 행복하다니, 뭔가 내용과 형식 사이의 불일치가 있는 것 같지 않은가? 원인과 결과 사이의 어긋남이 발생한 것 같지 않은가?

어떠한 사건이 발생한다 하더라도, 예컨대 내 아이가 교통사고가 나서 불구자가 되든, 내 사업이 망하든, 사랑하는 애인과 헤어지든, 나라가 망하든, 지구가 멸망하든 사건의 내용과 무관하게 언제나 행복할 수 있다. 행복이 인생의 궁극적 목적이라면, 어떠한 경우에도 행복해야 한다면,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할 도구만 갖추게 된다면, 우리는 이러한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이것이 도대체 합리적인 일일까. 이것이 과연 우리가 바라는 삶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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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이 인생의 목적이 될 수 없음에 대한 철학적 논증이 꽤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행복이 인생의 목적이라는 주장이 마치 자명한 공리처럼 통용되는 것이 현실이다. 김어준의 <<건투를 빈다>>를 보니, "우리가 다 행복하려고 이 지랄을 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식으로, 마치 너도 알고 나도 알고 있다는 투로 동의를 강요하고 있다. 아니다! 겉보기와는 달리 행복이 인생의 목적이라는 주장은 별 근거가 없다. 이 세계가 웃긴 것이, 보겠다는 사람에게는 보고 싶은 것을 보여주는 속성이 있어서 '어, 어'하는 사이에 쉽게 속아넘어 가게 된다. 행복이 인생의 목적이 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몇 가지 논증을 시도해보자.

1. 목적과 수단, 전체와 부분 논증

행복이 인생의 목적이라고 하자. 목적은 수단과 대비되는 개념이다. 따라서 행복이 인생의 목적이라면, 인생은 행복의 수단이 된다. 행복이 인생의 목적이라는 주장은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익히 들어온 말이라서 별로 이상한 느낌을 주지 않는다. 하지만 인생이 행복의 수단이라는 주장은 매우 낯설게 느껴진다. 왜 그럴까?

인생이란 우리 삶의 전체인데 반해, 행복은 인생의 어느 순간에 느끼는, 상대적으로 오래 지속되는 긍정적 감정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 긍정적 감정에는 행복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다. 앤드루 커노한이 <<종교의 바깥에서 의미를 찾다>>에서 말한 것처럼, 

행복은 수많은 강렬한 정서 중 하나에 불과하다. 행복은 감사, 즐거움, 유쾌함보다는 더 강렬한 반면 의기양양, 기쁨, 환희, 희열, 지복, 황홀, 도취보다는 약한 정서다. 행복이 하나의 정서에 불과하다면 이런 정서를 추구하는 것이 어떻게 인생의 올바를 목적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유사한 정서 중 환희나 희열 같은 더 강렬한 정서를 추구하면 안 된단 말인가?

앤드루 커노한, <<종교의 바깥에서 의미를 찾다>>, p. 260

즉 행복은 인생의 여러 체험 가운데 하나인 정서 체험이며, 정서 체험 가운데 하나인 긍정적 정서체험이며, 긍정적 정서체험 가운데 상대적으로 온건한 하나의 체험일 뿐이다. 인생이 전체라면, 행복은 부분이다. 아니 부분의 부분의 부분이다. 따라서 행복이 인생의 목적이라는 주장은 부분이 전체의 목적이라는 말과 같다. 이것은 "대한민국의 목적은 이명박이다"라든가 "내 인생의 목적은 나의 간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오류다. 행복을 인생의 목적으로 추구했을 때 나타날 결과는, 지난 4년간 마치 이명박 일당이 대한민국 전체의 목적인 것처럼 정치했을 때 나타난 결과와 유사할 수 있다.



종교의 바깥에서 의미를 찾다

저자
앤드루 커노한 지음
출판사
필로소픽 | 2011-11-14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무엇이 우리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가!나와 세계 그리고 삶의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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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목적과 결과 논증

행복은 인생의 목적이 아니라, 다른 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추구한 결과로서 나타나는 부산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래야 자연스럽다. 안 그러면 객관적 가치가 없는 주관적 관념론으로서의 행복으로 전락한다.(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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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가 많은 이들에게 심어놓은 편견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무거운 것이 빨리 떨어진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행복이 인생 최고의 목적이라는 것이다. 첫번째 과오는 갈릴레이가 피사의 사탑에서 실험을 함으로써 깨졌는데, 두번째 과오는 아직도 맹위를 떨치고 있다.

사실 아리스토텔레스로서는 억울할 수도 있겠다. 우리말로 행복, 영어로 happiness로 번역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원어는 eudaimonia인데 직역하면 '훌륭한 영적 존재'라는 뜻이다. 오늘날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오래 지속되는 긍정적 감정으로서의 행복과는 거리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행복'은 굳이 말하자면 역사적으로 특수한, 즉 고대라는 시간과 그리스라는 공간에 한정된, 철학적 개념으로서의 행복이다. 현대 일상 용어로서의 행복과는 싱크로율이 50% 정도밖에 안될 것 같다.

실제로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읽어보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인생의 목적으로서의 행복 개념은 오늘날에는 별로 적실성이 없다고 보인다. 철학적 개념으로서의 행복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하는 인간의 본질인 '이성'을 가장 잘 발휘해서 고대 그리스에서 핵심 덕목이었던 용기, 정의, 우애, 관대함 등에서 탁월하게 사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날 우리의 관점에서 볼 때, 뭔가 개념이 한 곳에 모이지 않고 여러군데 흩어진 것을 얼기설기 모아서 엉성하게 하나의 이름으로 부르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진다.

논증 자체도 허술하다:

-행복은 가장 좋은 것, 최고선이다. 최고선은 다른 것을 위한 것이 아닌 그 자체로 목적인 것이다.

-행복이 무엇인지 알려면 인간의 기능을 알아야 한다. 좋음(잘함)은 항상 기능에 있어서 좋은 것, 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능에서 좋은 것/잘하는 것은 탁월성이다.

-인간의 기능은 무엇인가? 이성이다.

-따라서 인간적인 좋음은 탁월성에 따른 영혼의 활동이다. 그것은 바로 관조이다.

-관조는 최고의 활동이며, 가장 연속적이고, 지혜에 따르는 활동이 가장 즐거우며 자족적인 것이다.

-이러한 삶은 인간적 차원보다 높은 것이며 신적인 것이다.


줄리언 바지니는 <<빅 퀘스천>>에서 인생의 목적을 행복이라고 보는 것을 논박하는 데 그치지 않고, 최고의 행복을 관조라고 본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을 철학자의 '직업적 편견'으로 폄하한 바 있다. 

굳이 아리스토텔레스를 변호하자면, "인생의 목적은 행복이다"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은 "인생의 목적은 훌륭한 삶을 사는 것이다"라고 해석해야 옳을 것 같다. 이렇게 바꿔놓고 읽어보면 별로 정보가치가 없는 당연한 말이 되고 만다. "인생의 목적은 훌륭하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이다"라는 말을 반박하는 데 굳이 철학적 논증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처럼, 인생의 목적이 훌륭한 삶은 사는 것이라는 말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도 철학적 논증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가 한 작업은 그러면 훌륭한 삶이란 무엇이냐를 따져보는 것으로 전환된다.

크게 보아 아리스토텔레스가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전개한 논증은 인생의 목적이 행복임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라기 보다, 훌륭한 삶이란 무엇인가를 논증한 것으로 봐야 할 것 같다. 즉,

"인생의 목적은 행복이다"라는 주장은 논증이 필요하다. 오늘날의 의미로 볼 때 인생에는 분명히 행복이 아닌 다른 많은 가치들이 있는데, 다른 가치를 제쳐두고 행복이 인생의 목적이라고 했을 때에는 정당화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생의 목적은 훌륭한 삶을 사는 것이다"라는 주장은 별다른 논증 없이도 직관적으로 수용가능한 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면 훌륭한 삶이란 도대체 뭔데?라는 질문이 나오고, 여기서 "훌륭한 삶은 이성적 탁월함의 최고 활동으로서 철학적 관조다"라는 정보 가치가 있으면서 정당화가 필요한 결론이 도출된다. 물론 이 결론은 철학자들이 아닌 한 별로 동의할 수 없는, 직업적 편견으로 가득찬 생뚱맞은 결론이긴 하지만 말이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국내도서>인문
저자 :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 김상진,김재홍,이창우역
출판 : 길 2011.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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