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클리의 지각존재론과 상식인들의 실체존재론은 상반되는 주장처럼 얘기되는데, 엄밀히 말해서 서로 논리적으로 모순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존재에 대한 두 가지의 서로 다른 해석일 뿐인 듯하다.

버클리의 지각존재론은 틀렸다기보다 불편하다. 지각존재론으로 가면 사건을 기술하기 위해 필요한 정보량이 너무 많아진다. 시간의 지속 속에서 자기동일성의 유지하는 객관적 실체를 부정하고 있기 때문에 T1, T2, T3.....Tn 등 각 시간별로 감각적 지각의 모양이 약간만 달라져도 상이한 지각에 대해 상이한 명칭을 붙여줘야 한다. 반면 실체존재론을 택할 경우에는 어휘와 정보 면에서 보다 경제적일 수 있다.

예를 들어 실체존재론을 채택한다면 "아침에 동해에서 해가 떠서 저녁에는 서산으로 해가 진다"라고 말하면 되지만(해라는 실체를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지각존재론을 택한다면 해나 바다 같은 실체가 인정되지 않으므로 "아침 6시에 동쪽에 파란색의 출렁이는 감각적 지각 위로 붉은 색의 손톱 같은(이 명칭도 버클리에게 가능하지 않을 것 같다. 버클리에 따르면 손톱이라 부를 만한 객관적 실체가 없어야 한다.) 모양의 빛(빛이라는 말이 가능한지도 의문이다.)이 나타나고, 6시 10분쯤이면 '직경3cm로 측정되는 붉은 원 모양의 감각적 지각'이 파란색의 출렁이는 감각적 지각 위로 완전히 떠올랐다가, 오후 6시가 되면 서쪽에 녹색의 삼각형 모양의 감각적 지각에 닿으면서 점점 붉은 색 감각적 지각의 크기가 점점 작아지다가 오후 6시 10분쯤 되면 붉은 색 감각적 지각은 사라진다."

버클리의 관점을 채택한다면 매우 단순한 사건에 대해서도 말 한마디 하기가 너무도 불편해서 의사소통에 지장을 줄 정도다. 버클리식 인식틀을 가짐 사람은 진화적으로 생존가치가 떨어질 것이 확실하다. 반면 실체존재론으로 가면 필요한 단어수와 정보량이 줄어든다. 실체성 단어 하나가 보유하는 정보집적도가 높다. 한큐에 정리된다.

내 생각에는 버클리의 지각존재론과 상식인의 실체존재론 가운데 누가 맞는지를 검증할 방법은 없지만, 누가 더 편리한지는 쉽게 판가름난다고 할 수 있다. 결국 논리적으로는 두 가지 관점 모두 가능하지만 실체존재론이 더 단순하다. 진화론적 생존가치가 있기 때문에 인간은 지각존재론이 아닌 실체존재론으로 기운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한 살도 안 된 어린이들도 대상의 실체성을 전제하는 것처럼 행동한다.

버클리의 지각존재론은 불교에서 석가모니가 깨달았다는 제행무상의 인식과 유사하다. 부처가 창시했다는 위빠사나에서 제행무상을 얘기할 때는 지각존재론의 입장을 취하여 실체가 없다고 보는 듯하다. 그때그때 생멸하는 '지금 여기의 마음챙김'이 있을 뿐이다. 실체가 있다는 생각이 미망에 빠진 것이고, 실체가 없다는 제행무상이야말로 참된 진리라는 것이다. 내가 볼 때 이것은 결국 버클리식 주관적 관념론의 석가모니 식 버전에 불과하다. 제행무상의 관점은 실체존재론을 넘어서는 진리가 아니라 실체존재론과는 다른 또하나의 해석 방식이다. 그런데 대체로 실체론 보다는 불편하다. 유용한 점이 있다면 자아라는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관점을 택했을 때 생로병사의 고통을 겪는 주체가 없다는 생각을 통해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가능성 뿐인데 이러한 특이한 인식을 진실로 믿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참선, 명상과 같은 상당히 혹독한 훈련이 필요하다.

세계는 지각존재론과 실체존재론 두 가지를 모두 허용한다. 논리와 증거를 가지고 볼 때 어느 한쪽이 옳고 다른 한쪽은 틀리다고 검증하고 반증할 방법은 없다. 세계는 무한한데 인간의 인식틀은 유한하기 때문에 이러한 이견이 생겨나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은 두 해석 모두 가능하다. 두 해석 가운데 하나(제행무상)가 옳고 다른 하나가 틀리다는 관점보다는, 두 해석 모두 가능하다는 관점이야말로 불교에서 말하는 공즉시색의 원리가 되지 않을까? 하지만 어쨌든 실체존재론이 지각존재론보다는 진화적으로 생존가치가 높은 것은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Posted by 깊은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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