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적 지각의 대상들은 인상의 다발일 뿐이며 그것이 의식과 독립하여 실제의 대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다는 흄 등의 회의론자들의 주장을 보면, 책상머리에 앉아 사색에 잠겨있는 창백한 철학자들의 한계가 드러난다. 만일 철학자들이 도끼질로 장작을 패거나 무거운 짐을 지고 산을 오르거나 총칼을 들고 싸움을 하거나 물건을 사고 팔아 이익을 남기는 등 현실 속에서 실천하는 사람들이라면 흄과 같은 주관적 관념론의 회의론에 빠질 일은 없을 것 같다. 왜 속인들(흄의 용어를 따르면)은 인상의 다발이 다만 인식 주체의 마음 속에서만 생멸하는 존재임을 깨닫지 못하고, 검증되지도 않은(?) 외부 세계 사물의 존재를 가정하는가? 흄이 생각했듯 전문적인 철학적 소양이 없어서일까? 내 생각은 이렇다:

예전에는 외부 세계의 대상의 존재를 가정한 실재론자들과, 외부 세계의 대상의 존재를 부정한 관념론자들이 있었는데 진화적으로 볼 때 전자가 생존하고 후자가 멸종했다고 말이다. 외부 세계 대상의 존재를 부정한 관념론자들이라면 무서운 사자한테도 겁없이 덤벼들었을 것이고(사자는 객관적 실재가 아니라 복합 관념일 뿐이니까), 높은 절벽에서도 겁없이 뛰어내렸을 것이다(절벽도 객관적 실재가 아니라 주관적 관념일 뿐이니까). 따라서 관념론적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과 그 후손들은 철학을 통한 논리적 반증이 아니라 자연에 의한 실질적 반증을 통해 점차 멸종의 길을 걸었을 것이다. 반면 외부 세계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었던 실재론자들은 조심스런 몸가짐으로 인해 생존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 그리하여 요즘의 사람들은 대부분 실재론자들의 후손들로서 외부 세계 대상들의 존재를 의심없이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다음으로 외부 세계가 인식 주체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증명은 철학의 바깥에서 얼마든지 증명될 수 있다. 인식 주체인 생물의 역사는 박테리아로부터 따진다고 해도 40억년 정도다. 반면 우주의 역사는 140억년이다. 우주라는 외부 세계는 인식 주체인 생명체가 없이도 100억년 이상을 존재해 왔다. 흄이나 버클리 같은 주관적 관념론자들이 외부세계의 존재가 증명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을 때, 이들은 우주의 역사가 6000년 정도라는 소박한 기독교적 세계관에 머물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들이 만일 우주의 역사와 생명의 역사에 대한 현대적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면, 인식 주체로부터 독립적인 외부 세계의 존재가 증명 불가능하다는 과감한 헛소리를 함부로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인간의이해력에관한탐구
카테고리 인문 > 영미문학론
지은이 데이비드 (지만지,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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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깊은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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