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겐슈타인의 어투를 흉내내서 말하자면, 참으로 신비한 것은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이 아니라 도대체 왜 우리가 인생의 의미에 대한 질문을 그토록 끈질기게 던지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또는, 신비한 것은 신이 존재하는가가 아니라 왜 우리가 신의 존재에 대한 의문을 끈임없이 제기하고 있는가 하는 사실이다.

이에 대한 제시 베링의 대답을 차두리 식으로 말하면  "간 때문이야"가 아니라 "마음이론(theory of mind) 때문이야"라는 것이다. 즉 우리가 사회문화적 바이러스에 감염되기에 앞서, 우리의 뇌가 인생의 목적, 세계의 의미, 신적 존재에 대한 생득적 사유 형식을 탑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유 형식은 우리의 인지 체계가 진화해온 경로를 반영하고 있는데, 역설적이게도 우리의 두뇌는 인과적 설명에 입각한 진화론보다는 목적론적 설명에 입각한 창조론을
선호하도록 자연선택되어 있다는 것이다. 최소한 아직까지는 말이다.

그렇다면 마음이론이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타인에게도 나와 같이 느끼고 생각하고 의도하는 능력이 있다고 추론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이게 당연한 거지 뭐가 대단한 능력이라는 걸까?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하는 사회적 경험들에 이처럼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즉각 그가 지니는 관념들, 감정들, 생각들로 번역하는 능력(즉 마음이론)이 없다면 어떨지 생각해보자. 발달심리학자 앨리슨 고프닉과 앤드루 멜초프는 <아기들은 어떻게 배울까>(2000)라는 책에서 악몽 같은 예를 들었다. 이 저자들은 우리더러 이렇게 상상해보라고 말한다. 우리는 어느 식당의 식탁에 앉은 손님의 시점을 취해서 한 가족의 평범한 저녁 식사에서 오가는 대화를 그저 관찰하고 있다. 그 가족 중 한 명, 즉 아이가 형이 괴롭히자 울음을 터뜨린다.

우 리는 남편들과 아내들과 어린 형제들을 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로 보는 것은 옷들을 채우고 있고 의자에서 늘어져 있는 피부 자루이다. 그 피부 자루들의 꼭대기에는 쉬지 않고 움직이는 작고 검은 점들이 있고, 그 아래에서 구멍 하나가 더러 소음을 낸다. 그 자루들은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움직이고, 때때로 그것들 중 하나가 우리를 건드린다. 구멍들은 모양이 변하고, 때때로 두 점으로부터 짭조름한 액체가 흘러나온다.
<종교본능>p. 36

사실 이 사례는 마음이론의 사례라기보다는 실체성 인식의 사례로 보인다. 주관적 관념론 철학자 버클리의 주장 대로세계를 감각적 지각의 단순한 집합체로 여긴다고 할 때 (즉 그러한 감각적 지각을 일으키는 속성을 담지하는 실체가 없는 것으로 전제할 때) 세상이 얼마나 기괴하게 나타나는 것인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보다는 제인 구달로 대표되는 내셔설지오그래픽 다큐먼터리가 불러온 편견(?)과는 달리 침팬지가 인간처럼 타인의 마음을 추론할 능력이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 마음이론이 무엇인지를 좀더 쉽게 이해하게 해줄 수 있을 것 같다.

실험 내용은 이렇다. 아크릴 칸막이로 된 두 개의 구멍 가운데 하나에 손을 내밀면 음식을 준다. A라는 사람은 눈을 뜨고 있고, B라는 사람은 눈을 감거나, 가리개로 가리거나, 뒤돌아 있거나 심지어 양동이를 뒤집어 쓰고 있다. 인간의 경우는 두살배기 아이라도 당연히 A에게 손을 내미는 것을 선호한다. 왜냐하면 자신을 보지 않고 있는 사람은 음식을 달라고 내미는 손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음식을 주려고 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즉 타인의 마음을 추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침팬지의 경우는 어느 한쪽에 특별한 선호를 하지 않는 결과를 보여주었다. 인간과 99%의 유전자 싱크로율을 보인다는 침팬지가 인간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인 타인의 마음을 추론할 수 있는 능력 즉 마음이론을 공유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 실험은 인간을 자연계와 구분되는 특수한 존재로 끌어올리려는 불순한 의도가 깔린, 방법적으로 잘못된 실험이라고 공격받는다. 침팬지가 자기 종이 아니라 인간 종의 심리 상태를 추론하라고 요구받은 것은 잘못이다, 실험용 침팬지는 자연상태의 침팬지와는 달리 인공적인 동물원에서 자란 개체이므로 종 전체를 대표할 수 없다는 등의 비판을 받게 된다. 이후 침팬지의 마음이론에 대해서는 찬반 실험이 벌어지는데, 현재까지의 결과는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침팬지에게는 인간의 마음이론과 어렴풋하게도 비슷한 능력은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한다.

이 책은 마음이론에 관한 책이다. 마음이론 하나를 인정할 때, 거기로부터 신이 나오고, 영혼이 나오고, 불멸이 나오고, 내세가 나오고, 불멸이 나오고, 운명이 나오고, 인생의 목적과 의미가 나온다. 게다가 도덕과 윤리까지도 나온다. 가히 인간판 만물의 이론이다. 인간을 정의하는 새로운 기준이 나왔다. 인간은 타자의 마음을 추론하는 존재다. 심지어 마음이 없는 곳에서도 말이다.

결론적으로 신은 적응적 환상(adoptive delusion)이다. 모든 것을 지켜보고 판단하고 처벌하는 존재로서의 신 관념을 마음이론의 의도하지 않은 부산물로 얻게된 우리의 선조들은 쾌락적, 충동적, 이기적 행동을 자제하게 됨으로써 그렇지 못한 개체들보다 사회적 추방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됨으로써 진화적으로 자연선택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도 같은 결론을 도출할 수 있겠다. 인생의 의미라는 개념을 채택한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보다 자연선택될 가능성이 높을 수 있을 것이라고. 어떤 측면에서 그럴까.

니체는 왜 사는지 아는 사람은 어떠한 고통도 이겨낼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이 말을 몸으로 증명한 로고테라피의 창시자 빅토르 프랑클은 삶의 의미를 간직함으로써 자신이 아우슈비츠의 지옥으로부터 생존할 수 있었다고 증언한 바 있다. 어쩌면 이것이 인생의 의미라는 개념을 채택한 개체의 진화적 생존가능성을 높인 대표적 사례일 수 있겠다. 약간은 다른 범주지만 기업체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나타나고 있다. 90년대 이후로 상당수 기업들이 이윤 추구를 넘어서는 가치를 기업 비전으로 표방한다. 아마도 짐 콜린스의 <Good to Great>이 나온 이후 유행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윤의 극대화가 기업의 목표라는 주장이 80년대까지 경영학 교과서에 버젓이 나왔는데, 이 책 이후로는 그 얘기가 쏙 들어간 것 같다. 이윤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일반' 기업 대비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려는 '비전' 기업이 더 오래 생존할 뿐더러 주가상승률도 훨씬 높다는 실증적 증거를 제시하자, 기업들이 너도 나도 있지도 않은 비전을 마치 사기꾼이 자기집 가훈이 정직이라고 만들어내듯이 급조해냈던 것이다. (나중에 짐 콜린스가 꼽았던 비전 기업들도 하나둘씩 망하고, 주가도 원상 복귀했다는 풍문이 떠돌기도 했다).

아무튼 제시 베링에 따르면 인생의 의미는 신과 더불어 인간의 마음이론이 실제 마음이 없는 곳까지 확대 적용되어 범주오류를 일으킴으로써 발생하게 된, 하지만 진화적 적응에는 도움이 된 환상일 뿐이다. 그런데 신 개념은 앞으로는 진화적 적응에 별로 도움이 안 될 것 같다. 기술의 발달로 전세계가 감시카메라, 위성사진, 인터넷 정보 확산망으로 뒤덮이고 CSI 식으로 과학수사가 벌어지는 세상에서는 굳이 만인을 지켜보고, 판단하고, 처벌하는 신 개념이 필요치 않다는 것. 신 없이 인간의 기술만으로 지켜보고, 판단하고, 처벌하는 데 아무 문제도 없다는 것. 그렇다면 인생의 의미는? 인생의 의미는 아직 나타난지 얼마 안 되는 (19세기 유럽에서 이제 막 출현한) 개념이므로 앞으로도 적응적 환상으로서 크게 기여할 수 있지 않을까.




heBeliefInstinctThePsychologyofSouls,Destiny,andtheMeaningofLi
카테고리 인문/사회 > 명상
지은이 Bering, Jesse/ / (WWNorton&CoInc,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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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깊은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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