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굿바이 카뮈>>에 대한 어떤 서평을 보니 책에서 의미와 가치가 구분되지 않고 사용되고 있다는 지적이 있었다. 나로서는 구분을 했는데 그렇게 인식된다니 유감이다. 보통 인생의 의미와 가치를 혼동하여 쓰거나 함께 쓴다. 의미와 가치를 유사어로 취급하는 것이다. 하지만 <<굿바이 카뮈>>에서 의미는 가치의 특수한 형태로 쓴다. 의미는 더 큰 외부의 가치와의 연결을 향한 자기초월일 때에 한해서만 말해질 수 있다. 더 작은 내부의 가치와 연결될 때 의미있다고 할 수 없다. "내 삶의 의미는 나의 간이다"라고 할 수 없다. 간은 유용한 기능을 하는 내 몸의 일부분이므로 가치있다고 할 수 있으나 인생의 차원에서 의미있다고 할 수는 없다. 내 삶의 의미는 나의 바깥에서, 나보다 더 큰 어떤 가치와의 연결 속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피아노를 배우는데 동요 '작은별'을 연습한다고 하자. 한달간 연습해서 작은별을 마스터했다 하자. 동요 작은별은 이 사람의 피아노 초급 시절의 관점에서는 충분히 의미 있는 곡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작은별을 마스터한 다음에도 평생동안 작은별만 치는데 다른 곡으로 레파토리를 확장할 생각도 없고, 스타일에 변화를 주어 연주할 생각도 없이 동일한 편곡으로 동일한 곡을 동일한 스타일로 평생동안 연주한다고 할 때 이 연주가 그에게는 어떤 주관적 만족을 준다고 할지라도 (그리하여 어떤 제한적인 효용 가치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 사람의 인생의 관점에서는 더 이상 별다른 의미가 없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작은별은 이 사람에게 더이상 외부의 더 큰 가치와 연결되는 자기 초월이라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가치의 단순재생산은 가치라는 측면에서는 여전히 가치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변화와 성장이 결여된 가치의 단순재생산은 어느 시점부터는 더이상 무의미하게 여겨지기 시작한다. 의미는 가치의 확대재생산에서만 발생한다. 따라서 모든 의미있는 것은 가치가 있지만 가치 있는 모든 것이 의미있는 것은 아니다.
2. 사실과 가치, 존재와 당위의 혼재에 대한 지적도 있다. 삶의 의미가 존재의 문제가 아니라 가치의 문제라는 주장이다. 동의하지 않는다. 삶의 의미 개념에서 의미는 한편으로는 가치의 특수형태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가치의 차원이 아닌 다른 차원을 포함한다. 목적과 인과의 개념이다. 삶의 의미를 따지는 사람은 어떤 방식으로든 미래의 목적(및 결과)과 과거의 (우주적, 물리적, 생물학적, 사회적) 기원을 따지게 된다. 내세가 있느냐 없느냐, 우리의 탄생 기원이 유물론적 인과냐 신의 창조냐에 따라 삶의 의미에 대한 사람들의 해석은 달라진다. 목적론적인 창조론을 믿던 사람들이 인과적인 진화론의 세계관이 대두되면서 삶이 무의미하다는 허무주의로 빠지는 것이 그 예다. 목적론은 가치의 문제일 수 있으냐 인과 관계는 존재의 영역이다.
삶의 의미라는 개념이 역사적인 형성의 과정에서 가치 차원과는 별도로 인과적 관계라는 의미를 내부에 포섭하게 된 것이다. 일상언어적 용법이나 사람들의 머리 속에서 의미 개념은 분명 그렇게 작동한다. 예를 들어 노무현 대통령의 자서전을 보면, 인생의 의미가 뭐냐를 따지면서 성공이라는 통속적 가치와 더불어 우주론적 기원에 대한 사유를 전개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삶의 의미는 '생명'의 의미라는 과학적 토대와 무관하지 않기 때문에, 삶의 의미에 대한 논의는 가치론에만 국한되지 않으며 존재론의 영역까지 걸쳐있다고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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