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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6.28 장강명의 <<표백>>을 읽고 1

더 이상 이룩해야 할 위대한 일이 남아 있지 않으므로 자살할 수밖에 없다는 젊은이들의 이야기다. 100여년 전에 더 이상 새로운 발명은 불가능하다고 외쳤다던 미국의 특허청장 이야기가 생각난다. 물론 나라가 건국된지 50-60년이 되면 체제가 안정화되면서 지배계급의 계급지배의 구조가 견고화되고 이에 따라 하층민이 신분 상승하기가 점점 힘들어지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더 이상의 큰 꿈이 불가능하다는 작가의 선언은 너무 성급한 것이 아니었을까.

카뮈가 <<시지프 신화>>에서 철학적 자살을 다루었다면, 이 책은 정치적 자살을 주제로 하고 있다. 철학적 자살의 오류를 분석한 것이 <<굿바이 카뮈>>의 주제였는데, 정치적 자살의 경우는 어떨까? 논리 구조는 동일하지 않을까? 저자인 장강명의 전제는 이룰 것이 없는 삶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이룰 만한 대상은 일상의 소소한 가치가 아라 역사적, 사회적 변혁 같은 거창한 꿈을 말한다.

 ‘큰 꿈 없는 세대’를 만드는 요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우선 한국이 선진국이 되어가면서 사회체제가 안정되고 1970년대나 80년대처럼 파이가 많이 남지 않았다. 각 조직의 관료화가 완료돼 조직 내 세대교체가 쉽지 않아졌고, 새로운 일자리는 대개 서비스업에서 만들어지는 단순 노동거리다. 대단치도 않은 눈앞의 과실을 따기 위해 온 힘을 쏟다 보면 그만큼 생각의 폭이나 인물의 그릇이 잘아지게 된다. […] 과거 한국 기준으로는 큼 꿈이었던 것이 이제는 그렇지 않으니까.
  게다가 과거 세대들은 민주주의라든가 자본주의 정착, 근대 체제로의 편입과 같은 중요한 역사적 과업도 이미 달성했다. 이제 남은 것은 양성 평등이나 환경문제와 같은 거대 이데올로기라기보다는 소주제에 해당하는 것들이다.
  그다음에 나오게 될 이슈들은 한 세대의 과업이나 종교의 대용품이 되기에는 지나치게 사소한 것이리라. 성적 소수자 보호, 동물 보호, 장애인 인권 문제, 소비자 운동, 저개발국 원조 프로그램 등등.
  그래서 이 세대는 큰 꿈을 가질 수 없게 됐다. (29-30쪽)

삶의 의미의 기본 구조는 가치의 확대재생산을 통한 존재의 완성이다. <<표백>>은 우리 사회가 대체로 완성되었다고 본다. 그런가? 누군가 꿈이 없어 자살하는 사회가 완성된 사회일까? 사회적 완성이 개인에 대한 허무의 습격으로 되돌아오는 것일까?

철학적으로 볼 때, 무한에 도달하지 않는 이상 세계는 완성되지 않는다. 장강명은 사회적, 역사적 변혁이라는 부분적 가치를 전면적 가치인 양 절대화하고 있다. 나머지 가치들은 사회적, 역사적 변혁보다는 소소한 것들이라 본다. 하지만 아직 사회적, 역사적 변혁 보다 더 큰 꿈도 있다. 예컨대 우주적 도전이나 형이상학적 진리 같은 것을 들 수 있다. 지구가 50억년 후면 멸망하게 되어 있다는데, 누가 지구가 멸망하기 전에 생명계를 구원할 수 있을 것인가 같은 숙제들. 아직 인류가 태양계를 벗어나지도 못하고 우주의 비밀도 풀지 못했는데 마땅히 가치로운 할 일이 없어서 자살하겠다는 것은 사회역사적 가치만이 진정한 꿈이며 나머지들은 허접하다고 보는 가치의 독재주의내지는 우물안 개구리주의라 할 수 있다. 인간의 범위를 넘어선 생명 차원의 과업이 인간 사회의 역사적 변혁보다 더 큰 가치일 수 있다.

기본적으로 삶의 의미는 더 넓은 가치의 연결망 속에서 자신의 한계를 초월할 때 충족된다. 한국이 선진국이 되어서 더 이상의 큰 꿈이 불가능하다고? 한국이 선진국은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치고, 아직도 한국만큼도 선진화가 못된 독재국가가 세상에 널려 있다. 아르헨티나 사람인 체 게바라가 쿠바 혁명에 참가했듯, 다른 나라의 독재 체제를 전복하는 민주화 운동에 투신하는 큰 꿈은 어떤가? 큰 꿈이 없어서 자살까지 하겠다는 결심을 할 정도라면 최소한 국경 정도는 초월하는 사유를 할 수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멀리 갈 것도 없이 중국이 급부상하는 세계사적 격변 속에서 강대국의 호구 신세를 벗어나려면 남북 통일 같은 거대한 프로젝트를 통해 동북아의 중심국가로 발돋움하는 역사적 과제가 남아 있다고 보이는데, 겨우 남한 내부의 민주화, 선진화 정도가 가장 큰 꿈이라니 나름 거창함을 추구한다는 저자의 구호에 걸맞지 않게 스케일이 너무 작은 게 아닐까.

의미의 구조는 외부의 더 큰 가치와 연결되는 것이다. 외부와의 연결을 찾지 못할 때 허무주의로 빠지게 된다. 사회적, 역사적 변혁이라는 거창한 꿈도 더 커다란 가치의 부분 집합일 뿐이다.

각설하고, 이 책에서 내게 인상적인 부분은 20대 주인공이 7급 공무원 시험준비를 하면서 고시원과 PC방 알바를 전전하며 빈곤의 하한선에서 겪는 심리적 묘사, 예를 들어 반찬이 김치밖에 없는 것이 챙피해서 사람들과 함께 못먹는 것, 옆 사람의 햄 반찬 냄새를 맡으면서 돈없어서 못사먹는 것에 대해 괴로워 하는 것, 못 먹어서 피골이 상접하게 몸무게가 빠지게 되는 상황, 고시 공부가 잘 안돼서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맥주 마시기 유혹에 빠지는 것들...빈곤 속에서 병사한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 양이 생각나기도 하고, 이태원의 소설 <<객사>>가 생각나기도 한다. 집에 도움을 요청하면 되지만 자존심 때문에 그러지 못하는 사정들...

<<객사>>에서는 춘궁기를 맞아 몇날며칠을 굶던 어느 소작농이 어찌어찌해서 양반댁의 떡쌀을 수레에 싣고 가는 일을 맡았는데, 물에 불려놓은 생쌀을 슬쩍해서 한줌두줌 씹어먹다가 배가 터져죽는 비참한 장면이 나온다. 며칠을 굶어서 위가 쪼그라들었는데, 떡쌀이 뱃속에 들어가서 불어터지면서 놀란 배가 늘어나지 못하고 터져죽게 된 것이다. 대학교 때 서중석 교수가 한국근현대사 강의에서 추천도서로 읽어보라 해서 읽었던 소설인데, 왕년의 소작농의 비참함을 7급 공무원 준비생들이 이어나가고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표백

저자
장강명 지음
출판사
한겨레출판사 | 2011-07-22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표백되어 가는 우리 시대 청춘들의 자화상!제16회 한겨레문학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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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깊은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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