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가 지식의 논리적 완전성과 순수 사변적 체계를 지향하는 '강단철학'적 수준에 만족하는 사람을 '이성의 예술가'로 부른 것은 철학에서 실천과 이론이 분리되는 현상을 개탄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강단철학에 대한 비판은 여러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데, 비트겐슈타인의 경우는 철학교수가 양심적으로 살아가기는 논리적으로 불가능할 정도라고 생각해서 여러차례 케임브리지 철학교수직을 버리고 수도원에 들어가거나, 정신과 의사가 되거나 심지어 소련에서 육체노동자로 살아가려고 시도할 정도였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자신의 철학대로 살아가려는 사람들을 존경하며, 어떤 경우에는 철학대로 죽는 사람들(예컨대 소크라테스)을 더 존경하기도 한다. 반면 철학 따로 실천 따로인 사람(예컨대 실존주의 철학을 주창하고는 스승을 배신하고 나치와 타협한 하이데거)을 경멸한다.
그런데 철학과 실천의 개인 내부에서의 통일은 개인적 수준에서는 윤리적, 미학적으로 아름답기는 하지만, 철학과 실천이 분리된 강단철학이 반드시 비판받아야 할 일인지는 더 따질 필요가 있다. 예전에는 분명 철학의 창시자는 그 철학의 실행자였을 것이다. 예컨대 묵자가 이타주의를 몸소 실천하지 않았다면, 추종자를 얻지 못했을 것이다. 공자는 유학의 최고 실천자였고, 장자는 도가의 최고 실행자였으며, 석가모니는 가장 높은 수준으로 깨달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윤리학 교수가 윤리적인 삶을 살 것이라고 크게 기대하지는 않으며, 깨닫지 못한 이들도 중노릇을 한다.
이처럼 철학과 철학적 삶이 분리되고, 윤리학과 윤리적 삶도 분리되는 것에는 분업의 원리가 작동하고 있는 걸로 보인다. 분업의 측면에서 보자면 자동차 설계를 가장 잘하는 사람이 자동차 운전을 잘하는 사람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최고의 자동차 설계자가 운전을 별로 잘하지 못하는 것은 개탄할 만한 일인가? 오히려 양자가 분리되는 것이 사회적 수준에서의 가치가 극대화될 가능성이 커진다. 운전을 가장 잘 하는 사람 가운데서 최고의 자동차를 설계할 수 있는 사람보다는, 그렇지 못한 사람들까지 포함한 모집단에서 최고의 설계자가 나올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실존주의적으로 살 수 있는 사람만 실존주의 철학을 생산할 수 있다면, 하이데거의 철학은 아직도 출현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철학의 실천에서 보람을 느끼는 사람들을 모집단으로 하는 것보다는, 순수한 지식 자체를 추구하는 데서 기쁨을 느끼는 사람들을 모집단으로 했을 때 더 탁월한 철학 이론이 나올 수 있다.
분업 사회에서 철학적 이론과 실천의 통일은 대체로 개인적 수준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수준에서 일어난다. 삶의 의미의 기본단위가 개인이 아니라 사회일 수 있는 것처럼, 이론과 실천의 보다 완전한 통일 역시 개인적 수준에서가 아니라 공동체적 수준에서 나타나는 것일 수 있다. 이것은 무작정 개탄할 일이라기보다는 사회의 자연적 현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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