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의미는 삶 자체다, 라는 생각은 어떤 사실에 대한 서술이라기보다 우리의 사유가 외부를 향해 나아가다가 그 한계에 부딪혔음을 보여주는 징표에 불과한 것일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언어의 한계 같은 것이라기보다는 단순한 상상력의 한계에 불과할 수도 있다.
<<굿바이 카뮈>>에서 소개한 로버트 노직의 의미론에 따르면, 삶의 의미는 더 큰 외부의 가치의
연결망을 향해 자기를 초월하는 과정이다. 우리가 삶의 의미를 삶 자체로 본다는 말은 삶의 범위를 벗어난 더 큰 외부의 가치
네트워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거나, 설령 그런 게 있다 하더라도 이것을 삶과 연결시키는 납득할 만한 맥락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먼저 삶의 바깥에 삶보다 더 큰 가치의 맥락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대해서 살펴보자. 삶보다 더 큰 가치가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논리적으로는 얼마든지 생명의 바깥에 더 큰 가치의 연결망의 존재가 가능하다. 예컨대 기독교만 하더라도 생명의 바깥에 초월적 절대자가 있고, 삶의 의미는 신이라는 더 큰 가치와의 연결 속에서 부여받은 어떤 사명을 완수하는 것이 된다. 즉 기독교적으로 보면 삶의 의미는 삶 자체가 아니다. 그러면 신을 인정하지 않는 유물론자들은 모두 삶의 의미는 삶 자체라는 논리를 채택할 수밖에 없는가?
기독교의 논리에서 보아야 할 것은 인격신의 존재에 대한 사실 여부가 아니라, 삶의 외부에 있는 더 큰 가치(기독교에서는 권위)와의 관계 속에서 의미를 부여받는 패턴이다. 삶의 바깥에 삶보다 더 큰 가치가 존재하고(다르게 표현하면 상위의 가치 네트워크), 삶이 그 상위 가치의 네트워크와 연결되고, 그 상위 가치 네트워크 속에서 유의미한 기능을 수행함으로써 서로간에 가치를 주고 받을 때, 우리는 삶의 의미는 삶 자체다, 라는 동어반복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의미의 패턴은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의미사용론, 즉 의미는 언맥(global context) 속에서의 쓰임(use)이라는 관점과 부분적으로 일치한다.
그렇다면 삶의 의미가 삶 자체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생명을 둘러싼 외부의 상위체계 속에서 생명의 용도, 쓰임에 대한 유의미한 맥락화 논리를 찾아내야 한다.
물리적으로 봤을 때 생명의 바깥에는 생태공간과 더 나아가 물질적 우주가 있다. 우리가 삶의 의미가 삶 자체라고 본다는 얘기는
논리적으로 두 가지 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다. 첫째는 생명의 바깥에 존재라는 생태공간이나 물질적 우주는 생명보다 더 큰 가치의
네트워크가 아니라고 보는 관점이다. 생명이 생태공간이나 물리적 우주보다 더 가치가 있기 때문에 후자가 전자의 의미의 기반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이다. 둘째는 후자가 전자보다 더 크거나 최소한 동등한 가치의 연결망일 가능성은 인정하지만, 이 둘 사이를 유의미하게
연결하는 통로를 발견할 수 없다는 생각이다. 인간의 뇌 속의 뉴런의 연결망이 그러한 방향으로 인식할 수 있는 길을 아직 뚫지
못했기 때문일 수 있고, 아직 우리 문명의 세계관(특히 자연주의적 세계관) 자체가 우리의 삶 또는 생명의 의미를 우주 속에서 가치
측면에서 맥락화하는데 성공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수 있다.
러셀이 말한 것처럼 수백억 년이 지나면 열죽음을 맞이하여 영원히 소멸할 우주 속에서 덧없이 사라지고 말 생명의 의미란 무엇인가? 생명이 없어도 우주는 존재한다. 우주에게 생명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기 때문에 생명이 물질적 우주에서 유의미하게 기능하는 용도를 찾을 수 없다. 생명이란 그저 물질적 우주의 여러가지 우연적 조건이 기가막히게 맞아떨어져서 겨우 존재하는 어떤 것, 없을 수도 있었는데 어쩌다가 물질 위에 얹혀져서 존재하게 된 어떤 것이라고 보는 유물론적 혹은 자연주의적 해석에서는 삶의 의미가 삶의 바깥을 벗어나기 힘들어 보인다. 생명은 우주를 필요로 하지만 우주는 굳이 생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삶의 바깥에 물질적 우주가 존재하지만, 생명이 물질적 우주에 어떤 쓰임이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렇다면 삶의 의미가 삶 자체라는 동어반복을 넘어서는 사유를 가능하게 하는 논리는 아직까지 삶 자체를 창조한 인격 신을 상정하고, 인격 신의 의지를 실현하는 도구로서의 생명관을 가진 기독교 관점 밖에는 없는 것일까? 자연주의를 채택할 경우에 우리는 삶의 바깥을 넘어서는 의미를 찾을 수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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