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벌레가 삶의 끝이라고 부르는 것을 신은 나비라고 부른다.(리처드 버크)
김대식 교수처럼 삶의 바깥을 사유하지 못하고, 삶의 의미는 삶 자체라고 할 때, 우리는 애벌레의 관점에 머무는 것일 수 있다. 여기서 나비를 굳이 기독교 식으로 내세를 비유하는 거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것도 하나의 가능성일 수는 있지만 여기서는 제외한다. 내세가 없고, 내가 죽으면 낙엽이 되거나 박테리아가 되거나, 원자로 흩어졌다가 다른 생명의 구성물로 윤회한다고 할 때, 이것을 그저 삶의 끝이라고 볼 것이냐 아니면 나비로 볼 것이냐의 문제다. (사실 판단의 문제라기 보다는 가치판단의 문제이다. 하지만 세부적으로 보면 두 가지가 얽혀있다. 나중에 다시 살펴보겠다.) 여기서 개체의 죽음을 그저 삶의 끝이라고 보는 태도가 허무주의고, 나비라고 보는 것이 신의 관점, 즉 삶의 의미를 깨달은 이의 관점이다.
나의 삶의 끝이 모든 것의 끝인
것처럼 보는 애벌레의 관점을 취했을 때 두 가지 태도가 나온다. 하나는 절망적 허무주의다. 삶에 끝이 있음으로 해서 삶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허무주의에 빠질 수 있다. 물론 이 생각은 논리적 오류다. 영화에 끝이 있다고 해서 영화가 무의미해지는 것이 아니듯,
삶에 끝이 있다고 해서 삶이 무의미해지지는 않는다. 죽음의 절망에 압도당한 잘못된 감정판단일 뿐이다. 또다른 하나는 박이문 교수가
말하는 류의 행복한 허무주의다. 삶에 끝이 있고, 삶의 바깥은 허무이고, 삶은 무한한 허무의 바다에 뜬 작은 섬이지만, 삶 자체는
가치있고 유의미하다는 관점이다. 삶의 의미는 삶 자체라는 생각이 여기에 해당한다. 아마 김대식 교수의 관점도 여기에 해당하는 것
같다. 이 생각은 논리적으로 타당하지만 삶의 바깥을 사유하지 못하는 한계에 갇혀 있다.
왜 우리는 삶의 바깥을
사유하기 힘든가? 제시 베링이 <<종교본능>>에서 말했듯 삶을 살아가는 생명체에게 삶의 외부에 대한 관념은
진화적 관점에서 생존에 별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일까? 내 생각에는 그런 측면도 작용하지만, 비트겐슈타인의 용어로 말해서 대상들 사이의 "연결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삶의 의미를 깨닫는 것은 사실판단과 가치판단이 뒤섞여 있다. 사실판단에서는
정보가 부족하기 보다는(물론 그런 요인도 있지만), 정보들 사이의 연결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 종합적인 가치판단에 제대로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측면이 있다. 물론 모든 정보들과 그 연결관계들을 다 인식하고도 허무주의를 고집하겠다는 사람도 없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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