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는가?'에 대해 재미있는 블로그 포스팅을 발견했다. 우리가 눈이나 귀에 대해서는 '왜 보는가?''왜 듣는가?'라는 질문을 잘 하지 않는데, 왜 몸(또는 삶)에 대해서만 '왜 사는가?'를 묻느냐 하는 것이다.

왜 사는가라는 질문은 할 필요가 없다. 삶에 이유가 없다면 살 필요가 없다는 말은 의미없고 허망한 진술일 뿐이다.

질문을 이렇게 바꿔보면 어떨까.
왜 보는가? 왜 듣는가? 왜 말하는가?

눈과 귀와 발화기관이 존재하는 것은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다. 주어진 것이므로 보고 듣고 말하는 것이다. 어떤 목적을 위해 보는가? 무엇을 보기 위해..가 아니라면 볼 필요가 없는가?

삶을 택하지 않으면 무엇을 택할 것인가? 삶 이외의 선택지가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가? 애초에 자신의 의지로 삶을 선택한 것이 아니다. 삶은 본능이며 원래 있는 것이며 부정할 수 없는 전제 조건이다.

삶이 고통 그자체라면 삶을 견딜 수 없다면 단 하나의 선택지가 존재하기는 한다. 보는 것이 고통이라면 더이상 아무것도 보고 싶지 않다면 눈을 뽑을 수도 있다. (...).

당신은 눈을 뽑을 것인가? 삶 대신 죽음을 택할 것인가?

보고 듣는 것에 의문을 가지지 않는다면 삶에 대해서도 따로 이유를 찾을 필요가 없다.
따라서 왜 사는가 라는 질문은 적절치 않다. 삶은 절대적 전제이므로. 다만 우리가 질문해야 할 것은 어떻게 살 것인가? 이다. (...)

출처: http://evilbed.egloos.com/4603180

이 논리는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회의주의에 대한 비판과 유사한 것 같다. 우리의 삶의 양식 속에는 근본적으로 자명한 것으로 주어진 것들이 있는데, 이런 것들에 대해 더 확실한 증거를 찾고자 의문을 품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 내게 "당신 손이 두 개인지 확인해 보시오"라고 했을 때 내가 나의 두 손을 들고 보면서 "나는 손이 두 개 있는 게 확실해"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덤앤더머 같은 바보 영화에 나오는 장면으로 여겨질 것이다. 영화가 아니라 현실 속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바보같은 짓을 하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당신들 미친거요? 아니, 우리는 지금 철학을 하는 겁니다....

우리가 제 정신을 가진 인간이라면 손이 두 개라는 것을 못 믿어서 의심을 품는 회의주의적 태도와, 그 회의주의에 맞선답시고 자명한 것을 옹호하려는 행위 모두 약간은 말이 안 되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즉 어떤 근본적인 전제들에 대해서는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더 이상 그 전제를 보다 확실하게 만들거나, 또는 그것을 거짓으로 반증하는 일이 불가능해지는 지점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지점에서 근본명제들에 대해 확증하거나 반증하려는 모든 시도들은 말도 안 되는 넌센스로서, 부조리극을 보는 듯한 느낌을 자아내게 된다.

위 블로그가 제시하는 논증은 비트겐슈타인의 근본명제에 대한 입장과 유사한 것 같다. 삶은 우리에게 자명한 것으로 주어진 것인데 이에 대해 의문을 품고, 왜 사느냐고 묻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라는 것이다. 왜 사느냐고 물어봤자 그럴 듯한 이유가 나오지 않으며(ex. 왜 사는가? 살려고 산다), 별다른 이유가 없다 해서 자살할 것도 아니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삶이 '주어진 것'이라는 주장은 따져보면 부분적으로만 진리이다. 당신이 태어난 것은 주어진 것이 맞다. 그리고 어린 시절에는 산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고 사는 것이 맞으므로 주어진대로 사는 것이 맞다. 하지만, 성인 이후로는 삶이 의식되는 순간들이 있고, 점차 의식적인 삶의 영역이 확대된다. 주어진 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말이다. 실존주의에서 말하는 피투성과 기투성이다. 인간은 현재 속에 이미 던져진 존재지만, 미래를 향해 스스로를 던져야 하는 존재다. 주어진 것과 주어지지 않은 것이 결합되어 있다. 따라서 삶 전체를 이미 주어진 것으로 보는 것은 부분을 전체화한 오류다. (물론 자유의지를 100% 부정할 수 있다면 삶 전체가 주어져 있다는 주장이 가능해질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눈을 뽑을 것인가? 삶 대신 죽음을 택할 것인가?"를 묻고 있지만, 실제로 삶 대신 죽음을 택하는 사람이 있다. <<굿바이 카뮈>>에서 소개한 미첼 헤스먼처럼 멀쩡한 젊은이가 왜 사느냐에 대한 답이 없다는 이유로 철학적 자살을 감행하는 경우가 있다. 적어도 이 사람에게는 삶은 자명하게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살한 것이다.

아마 실은 이럴 것이다: 99%의 사람에게 삶은 자명하고 1%에게는 자명하지 않을 것이다. 그 자명하지 않은 사람도 99%의 시간 중에는 자명하다고 여기지만 1%의 순간에 자명하지 않다고 여길 것이다. 결론은 자명한 사람에게 왜 사느냐의 질문은 넌센스이지만, 자명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그 질문이 넌센스가 아닐 수 있다는 점이다. 인생이 자명하지 않다는 사람에게 인생이 자명한 사람이 왜 사느냐고 묻지 말라고 강요하는 건 맞는 얘길까?

인생이 자명하지 않은 데는 어느 정도 이유가 있다. 왜 보는가를 묻지 않는 이유는 보는 것이 고통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왜 사는가를 묻는 것은 사는 것이 고통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 고통에도 불구하고 살아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이것이 왜 사는가를 묻는 이유 중 하나이며, 이 질문은 언어의 유의미한 사용에 해당할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의 근본명제 가운데도 자명하지 않게 바뀌는 경우가 있다. 1950년대에 "나는 지금 달 위에 있지 않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자명한 얘기였고, 따라서 저런 말을 하는 것은 넌센스가 된다. 1969년 달 착륙 이후로 이 말은 더 이상 자명하지 않게 된다. 따라서 그러한 발언의 진위를 따지는 것이 유의미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누군가에게는, 또는 모든 이의 삶의 어느 순간에는 사는 것이 자명하게 다가오지 않는 시기가 있고 이 때 '왜 사느냐?"의 질문은 유의미할 수 있다. 실제로 일상 생활에서 "왜 사느냐?"의 질문은 "왜 보는가?"라는 질문보다는 말이 안 되는 질문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하나의 표현은 삶의 흐름 안에서만 의미를 지닌다"는 비트겐슈타인의 의미 기준으로 볼 때에도 "왜 사는가?"라는 말이 유의미하게 사용되는 생활 속의 사례는 풍부하게 존재한다.

Posted by 깊은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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