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삶의 의미'라는 직접적인 표현을 사용하고 있지는 않지만, 삶과 의미를 조합하는 착상의 초기 사례로 꼽히는 것은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에 나오는 구절이다.

 

"삶이란 한낱 걸어다니는 그림자.  

무대 위에서 한때 뽐내고 안달하다가 더는 들리지 않게 되는 가련한 배우.

그것은 바보가 지껄이는 이야기

요란하고 격렬할 뿐, 아무 의미도 없다."

(Life's but a walking shadow, a poor player

That struts and frets his hour upon the stage

And then is heard no more: it is a tale

Told by an idiot, full of sound and fury,

Signifying nothing.)

 
여기서 '의미'로 사용된 단어는 meaning이 아니라 signifying인데,
이 구절을 1765년 독일어로 번역할 때 Sinn을 사용하게 된다.
Sinn은 영어의 Sense(감각, 의미)에 해당되는 말로, 독일어로 처음 쓰인 삶의 의미라는 용어는 Der Sinn des Lebens이다.
그리고 독일어 Der Sinn des Lebens가 나중에 칼라일에 의해 영어로 역수입될 때 the meaning of life가 된다.
 
여기서 눈길을 끄는 점이 몇 가지 있다.
첫째는 삶을 의미와 연결시키는 초기 작업이 철학이 아니라 문학에서 비롯되었다는 점.
이것은 독일의 낭만주의 시인 노발리스가 "삶의 의미(Der Sinn des Lebens)"라는 표현의 창시자라는 것에서도 발견된다.
(노발리스가 1797-98년 사이에 쓴 비출간 단상의 "Nur ein Künstler kann den Sinn des Lebens erraten"
"오직 예술가만이 삶의 의미를 이해할 수/알아낼 수 있다."라는 구절이 '삶의 의미'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역사상 최초의 문헌이다. 참고로 독일어로 '삶의 의미'의 다른 표현인 Lebens Sinn(=Life's meaning)을 쓴 것은 1796년의 괴테인데, 이 표현은 Sinn des Lebens만큼 통용되지는 못했다.)
 
둘째는 첫번째와 연결되는데, 문학에서 바라보는 삶은 이야기 또는 텍스트에 비유되며,
이처럼 삶을 이야기로 비유하는 것에서 삶과 의미를 조합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이야기를 구성하는 것은 언어이며, 언어야말로 의미의 원초적 담지자이기 때문이다.
즉 '삶의 의미'는 사실 비유적 표현이지만, '언어의 의미'는 비유가 아니라 실제적 표현이다.
삶을 이야기(언어)로 비유한 이후에야 언어의 속성으로서의 의미가 삶의 속성으로서의 의미로 전이되는 현상이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즉 삶의 의미라는 표현이 보편적으로 받아지고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삶을 이야기 혹은 텍스트로 비유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처럼 삶을 이야기로 바라보는 문학적 관점에서 삶의 의미라는 표현이 탄생했다는 사실로부터 우리가 이끌어낼 수 있는 통찰은 무엇인가? 노발리스가 삶의 의미를 예술가만이 이해할 수 있다고 했을 때, 그것은 철학적이지도 과학적이지도 개념적이지도 이성적이지도 않은 것임을 보여준다. 그것은 신비적인 것이다. 비유적인 것이며, 애매한 것이며, 다의적인 것이며, 감성적인 것이다. 삶의 의미는 태생적으로 명료성과는 거리가 있으며, 중의적인 것을 부러 추구하는 것이다. 예술가가 이해하는 삶의 의미는 과학자가 이해하는 생명의 의미가 아닐 것이다. 그것은 해석학적 이해에 가까운 것이다. 우리가 삶의 의미를 물을 때 느끼는 막연함은 그 용어의 창조자(=시인)에 의해 어느 정도는 의도된 것이다. 왜 삶의 목적이나 삶의 가치라(예나 낭만주의자의 일원인 슐라이어마허가 1792년에 <삶의 가치에 대하여>라는 책을 발표한다)는 표현을 제치고 삶의 의미가 승리하였는가? 그것은 삶의 의미가 삶의 목적이나 삶의 가치보다 시적인 표현이기 때문이다. 삶의 의미는 삶의 목적과 삶의 가치를 자신의 내부에 품으면서 그 이상의 뜻을 담는 더 중의적인 표현이기 때문이다.

 

Posted by 깊은생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