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vid Benatar의 Human Predicament의 서문에서 그는 "What is it all about?"이라고 묻고는
그 대답은 "ultimately nothing"이라고 답한다.
인생이 궁극적으로는 무의미하다는 말은 어딘지 옹색하게 들린다.
'무의미하다'라는 말 앞에 '궁극적으로'라는 제한 사항을 걸어둔 데서 눈치챌 수 있다.
이 말은 인생이 '궁극적이지는 않은 범위에서는' 유의미하다는 전제를 함축한다.
극소수 사람을 제외하고는 이 정도의 의미만으로도 살아가는 데 별 지장은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궁극적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죽은 다음에 지구가 멸망하든 말든...같은 태도를 포함하여,
일상의 소소한 만족을 구하는 평범인들과,
인생을 무심한 눈으로 관조하는 달관자에 이르기까지
절대적 의미, 궁극적 의미가 없이도 대부분은 잘 살아간다.
인생은 우주적 관점에서는 무의미하다(?)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태양계 밖으로 탐사선을 보내고, 화성 거주를 추진하는 현재의 인류는
1천년 전의 인간에 비해서는 우주적으로 유의미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무의미하다고 치자.
인생이 우주적 관점에서 무의미하다고 치자.
그러나 당신의 스케일은 우주적이지 않다.
당신은 인간의 스케일 속에서 살고 있다.
당신의 사고는 가끔 우주적일 수 있겠지만 당신의 삶은 인간적 스케일을 초월할 수 없다.
따라서 인생은 당신의 스케일에서는 충분히 유의미하다.
인생이 궁극적으로 무의미하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케인스처럼 우리는 장기적으로는 모두 죽는다고 대답할 수 있다.
또는
"인생은 궁극적으로 무의미하다"라고 말하는 것이 유의미한 존재는 궁극적 존재뿐이다.
ps. 인류의 생활양식이 우주적 스케일에서 작동할 때 비로소 인생의 우주적 의미가 부각될 것이다.
불과 200년 전에 인류의 삶은 지구적 의미를 가지지 못했다.
지금은 인류세라는 지질학적 시대명을 만들 정도로 인간은 지구의 운명에 영향을 행사하게 되었다.
즉 인간의 삶이 지구적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는 주장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일론 머스크의 화성 이주 계획을 볼 때, 앞으로 100년 후에는 인간이 적어도 태양계적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기술발전의 측면에서 볼 때 인간의 삶이 우주적으로 무의미하다는 주장은 현재 기준의 제한적 관점일 뿐이다.
SF적 상상 속에서 인간의 삶이 앞으로도 우주적으로 무의미하지는 않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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