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영어권에서 인생의 의미와 관련해서 눈에 띄는 논의는 인생의 의미(meaning of life)와 인생 속 의미(meaning in life)를 구별하는 것이다.
인생의 의미는 추상적 전체로서의 인생의 의미를 말하는 것이고, 인생 속 의미는 개인들이 각자의 삶을 살아가면서 추구하는 구체적 의미들을 말하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논의는 이 둘을 구별하지 않아서 혼동을 일으키는 측면이 있긴 했다. 인생의 의미를 부정하는 허무주의자의 주장을 개인들의 소소한 의미들을 가지고 부정할 때 사실 이 둘은 대화를 하는 게 아니라 평행선을 긋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줄리언 바지니의 <러셀 교수님 인생의 의미가 도대체 뭔가요?>에서 인생의 의미가 없다는 주장에 대해 'It means a lot to me'라는 용법이 가능하다는 근거를 가지고 논박했을 때 그가 염두에 둔 것이 바로 인생 속 의미라 할 수 있다. 비록 바지니가 '인생 속의 의미'라고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고 '인생의 의미'라고 했지만 말이다.
허무주의자들이 인생 속 의미까지 반박하느냐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쇼펜하우어의 경우 인생의 소소한 불쾌함을 장황히 나열하는 것으로 봐서는 인생 속 의미까지 부정하고 싶어하는 속내를 가진 것으로 보이기는 한다. 하지만 대표적 반출생주의자 David Banatar 역시 '인생 속 의미'까지 부정하지는 못한다. 그가 부정하는 것은 '인생 속 의미'가 아니라 '인생의 의미'다. 그는 인생의 의미를 '궁극적 의미'와 같은 뜻으로 쓴다.
meaning in life라는 개념의 도입은 인생의 의미를 부정하고자 하는 허무주의자들과의 전투 속에서 개인적이고 구체적인 의미의 영역이 낙관주의자(?)들을 위한 최소한의 교두보로 확보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인생의 의미를 넘어 인생 속 의미까지 부정하고자 하는 허무주의자들에게 남은 논리는 무엇인가? 인생 속 의미는 우리가 찾는 인생의 궁극적 의미가 아니라느니, 아니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가 아니라 허상에 불과하다느니 하는 정도일 것이다.
아마 인생의 궁극적 의미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궁극적 똥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사람들은 궁극적 똥 같은 것이 없다는 것은 쉽게 이해하고 수긍하지만, 인생의 궁극적 의미는 꼭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을 가진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철학적 질병의 사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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