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정신과 의사이자 작가인 가미야 미에코는 '이키가이'(いきがい , 사는 보람)이라는 말이 외국어로 번역하기 힘든 일본에만 있는 표현으로, 일본어만이 갖는 애매모호하면서도 여운과 고상함이 느껴진다고 말한다. 서양의 'the meaning of life'(삶의 의미)나 '존재의 이유'(raison d'être) 같은 철학적이고 추상적인 개념과는 다른 좀 더 구체적이고 생활과 닿아 있는 뉘앙스가 있다고 한다. 일본어를 모르는 탓에 그것이 무슨 뜻인지 감이 오지 않았는데, 영화 <퍼펙트 데이즈>에서 코모레비(木漏れ日,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라는 단어를 접하면서 대략 어떤 뉘앙스인지 짐작하게 된다.
우리말로 '사는 보람'이라고 옮길 때 일본어 이키가이라는 표현의 뉘앙스가 얼마나 살아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삶의 의미'라는 말보다는 일상어에 가깝다는 느낌은 있다. 사는 보람이라는 말에는 The Meaning of Life/삶의 의미라는 단어가 풍기는 어떤 형이상학적 함축(예컨대 절대적, 궁극적 의미 같은)이 담겨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간단히 말하자면 '사는 보람'은 '삶의 의미'에서 형이상학적이고 신비적인 요소를 빼고 남은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가치들을 지칭한다고 보면 될 듯하다. 그러한 취지의 사는 보람이 무엇인지를 <퍼펙트 데이즈>라는 영화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주인공인 초로의 화장실 청소부 히라야마는 도쿄의 허름한 주택에 혼자 살면서 시지프스와 같은 단순 반복되는 노동을 하며 살고 있다. 별다른 사건이 없는 일상의 반복들...하지만 그의 삶이 특별히 권태로워 보이지는 않는다. 건성건성 일하는 후배 청소부와는 달리 히라야마는 이 단조로운 청소일을 긍정하고 변기 닦는 일에 몰입한다. 일에 대한 그의 태도는 장인이나, 묵언 수행을 하는 수행자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잠깐의 점심 시간에는 나무로 둘러싸인 신사의 벤치에 앉아 편의점 샌드위치를 먹으며 나뭇잎 사이로 떨어지는 햇빛을 구식 필름 카메라에 담는다. 일이 끝난 뒤 목욕탕에서 개운하게 몸을 씻고 탕에 들어가서 피로를 푼 뒤, 단골 식당에 들러 하이볼 한 잔을 반주로 저녁을 먹으며 소소한 리프레시를 즐긴다. 밤에는 책을 읽다가 잠들고, 자면서 흑백으로 된 꿈을 꾼다.
주인공은 똑같아 보이는 것들의 단조로운 반복 속에서도 미세한 차이를 발견하고 즐기는 심미안이 있다. 예를 들어 출근길에 트럭을 몰면서 카세트 테이프로 6070 올드팝을 듣는데 선곡이 매일 바뀐다. 매일 들르는 신사에서 작은 싹을 돋우는 식물을 발견하고는 능숙한 솜씨로 종이에 소중히 담아와 집의 화분에 옮겨 심는다. 동일해 보이는 반복 속에서 미세한 차이를 만들고, 그것을 즐기는 모습을 영화는 보여준다. 요새 말로 소확행, 옛말로 안분지족이다.
그에게는 거창한 삶의 의미(The meaning of life)가 있는 것 같지는 않다. The Meaning of Life은 'the'라는 정관사가 암시하듯 인생의 유일한, 궁극적인 의미를 추구하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신과 같은 것. 그러나 신을 제외하고는 그러한 궁긍적이고 절대적이며 초월적인 의미의 원천을 찾기는 쉽지 않다. 그렇다고 허무맹랑한 신를 믿기도 힘들다. 남은 것은 허무주의뿐? 이런 상황에서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기 위해 요즘은 인생의 의미 대신에 '인생 속 의미들'meanings in life라는 말을 쓴다. 인생의 바깥에서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는 외부의 더 큰 가치로서의 인생의 의미와 달리 인생 속 의미들은 일단 복수meanings이다. 즉 궁극적 의미가 없다손 치더라도 삶 속의 의미들을 긍정하는 표현이다. (허무주의자들은 예전에는 이 둘을 구별하지 않고 인생이 무의미하다고 주장하였으나 최근에는 삶 속의 의미를 반박하는 일은 포기하고 삶 전체의 의미가 없다는 전선으로 후퇴했다.)
결국 우리말로 사는 보람으로 번역되는 일본어 이키가이는 영어 식으로는 The Meaning of Life(삶의 의미)보다는 meanings in life(인생 속 의미)에 더 가깝고, 그 가운데서도 사소한 축에 속하는 의미들에 가까운 듯하다. 인생 속 의미 가운데서도 나름 거창한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국가, 이념 같은 것들부터 성공과 업적까지, 절대적이거나 궁극적이거나 초월적 의미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거창한 가치들이다. 이 영화에서는 그런 것들을 취급하지 않고 가장 소박한 것들만을 보여준다.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이나, 낡은 카세트 테이프로 듣는 옛노래, 허름한 식당에서 마시는 시원한 하이볼 한 잔, 술집 여주인과의 가벼운 노닥거림, 귀여운 조카의 뜻밖의 방문 같은 사소한 것들. 이런 것들은 삶의 의미라고까지 하기에는 뭔가 한끝 모자라는 것들이다. 이런 것이 사는 보람, 이키가이에 해당하는 게 아닌 듯 싶다. 대부분의 사람은 삶의 의미까지 생각하지 않더라도 약간의 사는 보람만 있으면 스스로를 지키며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영화는 보여준다.
내 생각에 이키가이는 우리말의 소중한 것에 가까운 듯하다. 삶의 의미는 중요한 것이고, 사는 보람은 소중한 것이다. 삶의 의미는 객관적으로 중요한 가치가 있는 것이고, 이키가이는 나에게 소중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영화 퍼펙트 데이즈의 주인공의 직업은 남들에게는 하찮은 일로 치부되는 화장실 청소부이지만 그에게는 전력을 다해 일할 가치가 있는 소중한 업이다. 신사의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을 찍은 사진들은 남들에게는 별 가치가 없겠지만 히라야마에게는 삶의 소중한 기록이다.
물론 이같은 일상의 소소한 행복이라는 것도 겉보기처럼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언제든 루틴을 뚫고 우리를 아래로부터 집어 삼키려는 삶의 중력들을 이겨내야 한다. 때로 삶의 저항을 뚫고 나가야 하고 역풍을 거슬러야 하며, 강력한 스트레이트 펀치를 맞고도 쓰러지지 않고 비틀거리며 전진해야 한다. 사람들과도 지나치게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소통의 끈을 놓치 않는 삶의 기예를 갖추어야 겨우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자전거를 타고 가다 비를 맞기도 하고, 손에 오물도 묻히고, 모욕을 당하기도 하고, 기대를 배신당하기도 하고, 불쑥 손길을 내미는 타인을 거부하기도 하고, 예고 없는 손님을 자기방에 들이기도 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돌발 사건들, 매끄러운 루틴의 흐름에 파문을 일으키는 우연들이, 반복되는 일상에서 차이와 긴장, 설렘을 일으켜 삶을 다채롭게 만든다. 이러한 차이들이 가져오는 의외성이 동일성의 단조로움을 밀어내는 미세한 힘이다. 헤겔처럼 달라보이는 것이 사실은 같은 것이라는 동일성의 철학을 가진다면 당신은 권태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 비트겐슈타인처럼 같아보이는 것이 사실은 다른 것이라는 차이의 철학을 가진다면 당신은 권태를 이겨낼 가능성이 높다. 히라야마는 후자이다. 그는 일개 화장실 청소부지만 히라야먀는 노동 바깥에서만 자기를 긍정하고 노동 속에서는 자기를 부정하는, 마르크스적인 소외된 노동을 하는 노동자는 아니다. 건성으로 일하는 후배와는 달리, 노동일을 긍정하고 그에 전념한다. 시지프스의 단조로운 노동 속에서 지루함을 느끼는 후배와 달리, 히라야마는 화장실 청소에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유전자 변이를 타고난 것일까? 그보다는 장인의 자세를 견지하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곳까지 변기 구석구석 닦는 그의 모습은. 롱펠로우의 시를 떠오르게 한다.
더 오래전 예술의 시대에는
건축가들이 최고의 세심함을 기울여 공들여 만들었지
매 순간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도,
신들이 모든 곳에 계셨으므로.
물론 영화에는 속임수가 있다. 히라야마의 삶이 마치 거의 매끈하게 흘러가는 것처럼 보이게 착시효과를 만들어냈다. 히라야마는 늙었지만 일단 키가 크고 잘생겼다. 술집 여주인도 다른 남자들에게는 관심이 없고 히라야마에게만 은근한 눈빛을 보낸다. 후배의 여자친구조차 못생긴 후배 청년이 아니라 늙은 히라야마의 뺨에 뽀뽀를 한다. 히라야마가 못생긴 키작남이었다면 영화의 아우라는 약간은 달라졌을 것이다. 히라야마는 청소부이지만 독서와 화초 키우기 같은 고급 취미를 가졌다. 술집 여주인의 전남편처럼 불치병에 걸리지도 않았다. 그는 아직 건강하고, 우울증도 없다. 영화에서 전제되고 있는 이러한 조건들은 사실은 어느 정도는 희귀한 것이다. 그래서 가이야 미에코가 말한 '별일 없이 평온한 매일을 보내는 사람'은 사실 평범해보여도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
세상에는 매일 아침 눈을 떴을 때 잠에서 깼다는 사실 자체가 견딜 수 없이 두려운 사람들이 있다.‘아, 오늘도 하루를 살아내야 하나’하는 생각에 몸을 일으킬 힘도 나지 않는 사람들. 참을 수 없는 고통과 슬픔, 몸이 잘려나가는 듯한 고독과 외로움, 끝없는 허무와 권태를 느끼면서 자신에게 ‘왜 살아야 하나, 무엇 때문에……’묻지 않을 수 없는 사람들. 가령 완치가 어려운 병에 걸린 사람, 소중한 사람을 잃은 사람, 모든 것을 걸고 노력했던 일이나 이상에서 좌절을 맛본 사람, 자신이 저지른 죄로 고통받는 사람, 홀로 인생의 뒷골목을 걷는 사람들." (가미야 미에코 ≪이키가이≫ 9쪽)
히라야마의 삶엔 일상을 파괴할 전쟁이나 정치적 혁명 상황도 발생하지 않았는데, 이 또한 역사상 모든 개인이 얻는 행운은 아니다. 주인공 히라야마는 알게 모르게 어느 정도는 행운아였던 셈이다.
이 영화에서 히라야마가 가끔씩 루틴이 뚫렸을 때 느끼는 존재의 근원적 기분은 불안이 아니라 회환으로 보인다. 히라야마의 과거는 나오지 않지만 삶의 의미를 한 번쯤 상실한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사는 보람을 잃었다가 다시 찾은 사람 특유의 잔잔한 관조와 슬픔, 세상사에서 한 한발짝 쯤 덜어져서, 살짝 몸을 비켜서서 바라보는 초연함이 묻어나온다. 가미야 미에코에 따르면, 한번 사는 보람을 상실한 사람이 이를 다시 찾는 데는 몇 가지 길이 있는데, 그 중 중요한 게 자연과 예술이다. 히라야마가 즐기는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과 화초 키우기는 자연을 나타내고, 사진 찍기와 노래 듣기, 책 읽기는 예술을 나타내는데, 바로 이것들이 사는 보람을 되찾는 전형적인 매개체다. 삶의 의미를 한 번 크게 상실했다가 되찾은 히라야마에게는 더 이상 거창한 인생의 의미 따윈 관심사가 아닐 것이다. 소박한 이키가이로 충분하다. 그 정도면 되었다.
이 영화는 "삶의 의미가 없어도 사는 보람은 있을 수 있어!"라고 말한다. 어쩌면 사는 보람은 삶의 의미의 맹아적 형태이다. 삶을 지나치게 넘어서지 않는 가치에 견고하게 머무르는 것. 그것은 한편 삶의 의미가 가지는 허황됨의 위험이 없는 견실한 토대를 가지지만, 또한 사는 보람의 한계이기도 하다. 자신과 자기 주변에 충실하지만, 자기를 초월하는 더 큰 기획에는 참여하지 않는다는 한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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