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한 공간의 영원한 침묵이 나를 전율케 한다."

파스칼 때부터 이미 우주와 삶의 의미를 연결시키는 착상의 싹을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착상은 보통 허무주의적 감정으로 귀결되는 경향을 띤다.

이 때의 우주는 무한, 영원, 침묵, 어둠, 차가움으로 표현되는,

카뮈식으로 말하자면, 나에게 무관심한 낯설고 적대적인 타자의 느낌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왜 우리는 자기 주변의 소소한 일상에서 삶의 의미를 찾지 않고

저 멀리 안드로메다에서, 우리 우주를 넘어 다중우주에까지 가서 삶의 의미를 찾는 경향을 보일까.

그것은 우리가 쉽게 빠지는 근본주의적, 환원주의적 성향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즉 세상의 근원을 원자에서 찾는 것과 비슷한 성향이 삶의 의미를 우주에서 찾는 태도와 연관되어 있다.

 

그런데 근본적인 것을 추구할 때 보이는 환원주의적 입장을 생각해 볼 때

우리는 왜 삶의 의미를 원자에서 찾지 않고 우주에서 찾는 것일까.

재미있는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것은 아마도 노직이 말한대로 의미가 자신보다 큰 가치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나타나기 때문일 것이다.

내 삶의 의미는 나 삶보다 작은 어떤 것이 아니라 더 큰 어떤 것에서 찾는 것이 자연스럽다.

내 삶의 의미는 나의 발가락이라고 하면 우습다. 최소한 나의 가족 정도는 되어야 들어줄 만하다.

 

따라서 의미 찾기는 자신보다 작은 것을 찾아가는 원자를 향한 환원주의가 아니라

자신보다 큰 것을 추구하는 자연스런 생각의 흐름 속에서 우주를 향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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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의미를 찾을 때 우주 속에서 인간의 의의가 무엇인지를 궁금해하는 경우가 있다.

물론 우주에서 인간이 차지하는 의의가 있을 것이다.

예컨대 창조주가 염두에 둔 목적 같은 것.

그것은 기독교 식으로 인간이 지구의 지배자가 되는 것 같은 그럴싸한 것일 수도 있고,

SF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외계인을 위한 에너지 공급원의 역할 같은 비참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게 있다 해도 그것이 인간 삶의 의미 전부를 규정한다고 볼 수 없다.

 

회사를 예로 들어보자.

회사는 돈을 벌려고 나를 직원으로 고용한다.

나는 돈을 벌려고 노동력을 제공한다.

여기에는 자본과 노동 사이의 가치 교환이 있지만,

회사의 목적과 나의 목적이 꼭 일치하는 건 아니다.

물론 회사는 최대한도로 나의 노동력을 착취하려는 경향을 보이겠지만

나는 최대한 월급루팡짓을 하면서 회사의 자원을 나의 사적인 목적을 위해 빼돌리려고 할 수 있다.

서로 다른 속셈으로 공생하는 것이다.

 

삶의 의미도 그렇다.

우주 또는 생태계 전체에서 인간이 존재하는 의미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생태계의 입장과 인간의 입장은 다를 수 있다.

생태계의 목적이 곧 인간의 목적은 아니다.

생태계의 목적을 위해 인간이 사라져줘야 한다고 할 때, 인간이 순순히 사라져주지 않을 것이다.

생태계의 목적에 저항할 것이다.

 

따라서 인생의 의미를 찾기 위해 신 또는 우주가 생명을 만든 까닭을 알려하는 게 정답이 아닐 수 있다.

참고자료일 뿐이다.

회사가 무슨 의도를 가지고 우리를 채용했든, 우리는 우리만의 목적이 있다.

겹치는 부분이 있지만 동일하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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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의 의미'라는 말은 이상하다.

'연필의 기능', '연필이 만들어진 목적'은 가능하다.

반면 '인생의 기능'은 이상하다.

'인생의 의미', '인생의 목적'은 가능하다.

비트겐슈타인적 상황이다.

겉보기 형식은 똑같지만 내재적 문법은 다르다.

연필과 인생은 다른 문법을 사용한다.

 

어떤 사람이 "길가의 꽃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돌멩이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없다. 마찬가지로 삶에도 의미 따위는 없다?"라고 주장할 때, 그 사람은 '삶의 의미'의 문법이 '연필의 의미'의 문법과 동일한 문법을 따른다고 (잘못) 전제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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