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식은 생명체의 작업 효과이며, 인식 내용에는 인식하는 자의 내적 구조가 반영되어 있다는 마투라나의 주장은 칸트의 형식 철학의 생물학적 변주다. 칸트는 시간과 공간이 세계의 속성이 아니라 인식 주체의 인식 형식이라고 주장했다. 이 주장에 따르면 세계 자체에는 시간과 공간이 없다. 따라서 세계는 시작도 끝도 없다. 물자체는 무한이다.

영화 필름을 가지고 비유해보자.  무슨 영화를 예로 들까. 권투 영화 [록키]를 생각해보자. 영화의 내용은 필름 속에 담겨 있다. 이 필름 자체에는 시간이 없다.(영화를 찍는 것은 시간 순으로 찍어서 편집된 것이지만, 일단 완료된 상태의 물질적 필름은 무시간적이다. 시작에서 끝까지의 전 과정이 동시적으로 확정되어 있다.) 하지만 우리가 영화를 보려면 이 필름을 시간 속에서 펼쳐내야, 즉 상영해야 한다. 우리가 만일 세계를 통째로 순식간에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신이라면, 또는 감독이라면?), 우리는 영화 필름을 시간 속에서 상영하지 않고도 필름을 보는 순간 영화 전체의 내용이 머리 속에서 파악될 수 있을 것이다. 즉 완성된 필름(=세계) 자체는 시간으로부터 독립되어 있고, 필름을 가지고 영화를 보는 사람에게만 시간이라는 형식이 필요한 것이다.

그렇다면 무명의 록키가 아폴로와의 시범 경기를 통해 스타로 올라서는 이야기 자체 만을 놓고 보자. 이 이야기 자체는 확정적이며, 자기 완결적이다. 이 이야기를 시간적으로 풀어내면 로키가 싸구려 내기 권투를 하는 첫 장면에서 시작하여 지옥훈련을 통해 실력을 키우고 링 위에서 아드리안을 부르며 포옹하는 마지막 장면에서 끝난다. 우리는 분명 영화의 시작과 끝을 인식한다. 그리하여 영화 자체에도 시작과 끝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록키의 영화 필름을 가지고 있으면 [로키]는 이 우주의 어떤 시간, 어떤 공간에서도 재상영될 수 있다. 끝 없이 영원히 재상영 가능하다.

이것을 사람의 일생에 비유해 보자. 우리의 인생은 태어나서 죽음으로 끝난다. 죽으면 끝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우리의 삶 자체가 필름과 같다고 해보자. 필름 자체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그것이 시간 속에서 상영되는 한에서만 시작과 끝이 있다. 영화가 끝나도 필름은 그대로 남는다. 영화는 두 시간만에 끝나지만 필름 자체는 무한히 상영될 수 있다. 우리의 인생은 70년 만에 끝나지만, 우리의 실체(=필름) 자체는 영원할 수 있다. 실질적 검증 여부와는 별개로 최소한 논리적 가능성 면에서는 모순되지 않는다. 이것이 선승들이 우리의 삶에 시작도 끝도 없다고 한 이유일 것이다.


앎의나무인간인지능력의생물학적뿌리
카테고리 인문 > 철학
지은이 움베르또 마뚜라나 (갈무리,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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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깊은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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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산 규모 20억 달러로 포브스(Forbes)지가 선정한 미국 부호 400위 권에 오른 증권투자가 이반 보에스키는 자기 이름이 실린 잡지를 손에 들고 치욕에 떨며 아내에게 자신의 굳은 결심을 얘기한다.

"다시는 당신이 이 부자 리스트의 밑바닥에서 내 이름을 읽지 않도록 하겠어!"

뉴욕 시 외곽의 웨스트체트터 카운티에 190에이커에 이르는 대지에 12개의 방이 있는 조지아식 저택을 소유했으며, 미국 발레 극장과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도 직함을 보유하고 있던 이반 보에스키는 내부자 정보를 이용하여 약2천만 달러 상당의 부당이득을 취하는 비합리적인 모험을 감행하지만, 결국 부정 거래가 발각되면서 자신의 부와 명성을 날리는 위험에 빠지게 된다.

실천 윤리학자 피터 싱어는 [이렇게 살아가도 괜찮은가(How are we to live?)]에서 돈과 성공을 넘어서 어떤 인생을 추구해야 할 것인지를 묻는다. 그의 답은 바로 세상의 악을 줄이자는 것. 선행을 하는 것은 힘드는 일이니 최소한 악이나마 줄여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 그의 해답이다. 진화생물학의 Tit for Tat 전략을 도입하여 "처음에는 착하게, 나쁜 놈에게는 냉혹하게" 대할 것을 주장하는 그의 전략에 비추어 볼 때, 전두환 같은 인간에게도 관대한 대한민국 사회는 진화적으로 얼마나 취약한 것일까 궁금해진다.

이렇게살아가도괜찮은가
카테고리 인문 > 철학
지은이 피터 싱어 (세종서적, 199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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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 의미는 있는가?
이 질문을 던지기 전에는 우리는 일종의 순진무구 상태에 살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이 질문이 문제로 다가오는 순간,  삶이 과연 의미가 있는 것인지를 묻는 순간, 우리는 돌이킬 수 없는 길로 접어든다.

《The Search for Meaning: A Short History》, Dennis Ford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은 대체로 죽음의 의미를 최초로 의식하게 되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것같다. 죽음 앞에서 삶의 의미를 묻는 순간부터 우리는 순진무구한 어린 시절과 작별하게 된다. 그리고 삶과 죽음의 문제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을 때까지 인생의 방황은 끝나지 않는다. 문제가 문제가 되지 않는 가장 손 쉬운 방법은 기성세대가 되는 것이다. 삶의 문제 대신 생활의 문제로 대체하면 우리는 골치 아픈 삶의 의미를 잊고 살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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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인문/사회 > 종교
지은이 Ford, Dennis (California,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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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깊은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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