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정신과 의사이자 작가인 가미야 미에코는 '이키가이'(いきがい , 사는 보람)이라는 말이 외국어로 번역하기 힘든 일본에만 있는 표현으로, 일본어만이 갖는 애매모호하면서도 여운과 고상함이 느껴진다고 말한다. 서양의  'the meaning of life'(삶의 의미)나 '존재의 이유'(raison d'être)  같은  철학적이고 추상적인 개념과는 다른 좀 더 구체적이고 생활과 닿아 있는 뉘앙스가 있다고 한다. 일본어를 모르는 탓에 그것이 무슨 뜻인지 감이 오지 않았는데, 영화 <퍼펙트 데이즈>에서 코모레비(木漏れ日,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라는 단어를 접하면서 대략 어떤 뉘앙스인지 짐작하게 된다.

우리말로 '사는 보람'이라고 옮길 때 일본어 이키가이라는 표현의 뉘앙스가 얼마나 살아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삶의 의미'라는 말보다는 일상어에 가깝다는 느낌은 있다. 사는 보람이라는 말에는 The Meaning of Life/삶의 의미라는 단어가 풍기는 어떤 형이상학적 함축(예컨대 절대적, 궁극적 의미 같은)이 담겨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간단히 말하자면 '사는 보람'은 '삶의 의미'에서 형이상학적이고 신비적인 요소를 빼고 남은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가치들을 지칭한다고 보면 될 듯하다. 그러한 취지의 사는 보람이 무엇인지를 <퍼펙트 데이즈>라는 영화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주인공인 초로의 화장실 청소부 히라야마는 도쿄의 허름한 주택에 혼자 살면서 시지프스와 같은 단순 반복되는 노동을 하며 살고 있다. 별다른 사건이 없는 일상의 반복들...하지만 그의 삶이 특별히 권태로워 보이지는 않는다. 건성건성 일하는 후배 청소부와는 달리 히라야마는 이 단조로운 청소일을 긍정하고 변기 닦는 일에 몰입한다. 일에 대한 그의 태도는 장인이나, 묵언 수행을 하는 수행자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잠깐의 점심 시간에는 나무로 둘러싸인 신사의 벤치에 앉아 편의점 샌드위치를 먹으며 나뭇잎 사이로 떨어지는 햇빛을 구식 필름 카메라에 담는다. 일이 끝난 뒤 목욕탕에서 개운하게 몸을 씻고 탕에 들어가서 피로를 푼 뒤, 단골 식당에 들러 하이볼 한 잔을 반주로 저녁을 먹으며 소소한 리프레시를 즐긴다. 밤에는 책을 읽다가 잠들고, 자면서 흑백으로 된 꿈을 꾼다.

 

주인공은 똑같아 보이는 것들의 단조로운 반복 속에서도 미세한 차이를 발견하고 즐기는 심미안이 있다. 예를 들어 출근길에  트럭을 몰면서 카세트 테이프로 6070 올드팝을 듣는데 선곡이 매일 바뀐다. 매일 들르는 신사에서 작은 싹을 돋우는 식물을 발견하고는 능숙한 솜씨로 종이에 소중히 담아와 집의 화분에 옮겨 심는다. 동일해 보이는 반복 속에서 미세한 차이를  만들고, 그것을 즐기는 모습을 영화는 보여준다.  요새 말로 소확행, 옛말로 안분지족이다.

 

그에게는 거창한 삶의 의미(The meaning of life)가 있는 것 같지는 않다. The Meaning of Life은 'the'라는 정관사가 암시하듯 인생의 유일한, 궁극적인 의미를 추구하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신과 같은 것. 그러나 신을 제외하고는 그러한 궁긍적이고 절대적이며 초월적인 의미의 원천을 찾기는 쉽지 않다. 그렇다고 허무맹랑한 신를 믿기도 힘들다. 남은 것은 허무주의뿐? 이런 상황에서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기 위해 요즘은 인생의 의미 대신에 '인생 속 의미들'meanings in life라는 말을 쓴다. 인생의 바깥에서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는 외부의 더 큰 가치로서의 인생의 의미와 달리 인생 속 의미들은 일단 복수meanings이다. 즉 궁극적 의미가 없다손 치더라도 삶 속의 의미들을 긍정하는 표현이다. (허무주의자들은 예전에는 이 둘을 구별하지 않고 인생이 무의미하다고 주장하였으나 최근에는 삶 속의 의미를 반박하는 일은 포기하고 삶 전체의 의미가 없다는 전선으로 후퇴했다.)

 

결국 우리말로 사는 보람으로 번역되는 일본어 이키가이는 영어 식으로는 The Meaning of Life(삶의 의미)보다는  meanings in life(인생 속 의미)에 더 가깝고, 그 가운데서도 사소한 축에 속하는 의미들에 가까운 듯하다. 인생 속 의미 가운데서도 나름 거창한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국가, 이념 같은 것들부터 성공과 업적까지, 절대적이거나 궁극적이거나 초월적 의미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거창한 가치들이다. 이 영화에서는 그런 것들을 취급하지 않고 가장 소박한 것들만을 보여준다.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이나, 낡은 카세트 테이프로 듣는 옛노래, 허름한 식당에서 마시는 시원한 하이볼 한 잔, 술집 여주인과의 가벼운 노닥거림, 귀여운 조카의 뜻밖의 방문 같은 사소한 것들. 이런 것들은 삶의 의미라고까지 하기에는 뭔가 한끝 모자라는 것들이다. 이런 것이 사는 보람, 이키가이에 해당하는 게 아닌 듯 싶다. 대부분의 사람은 삶의 의미까지 생각하지 않더라도 약간의 사는 보람만 있으면 스스로를 지키며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영화는 보여준다.

 

내 생각에 이키가이는 우리말의 소중한 것에 가까운 듯하다. 삶의 의미는 중요한 것이고, 사는 보람은 소중한 것이다. 삶의 의미는 객관적으로 중요한 가치가 있는 것이고, 이키가이는 나에게 소중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영화 퍼펙트 데이즈의 주인공의 직업은 남들에게는 하찮은 일로 치부되는 화장실 청소부이지만 그에게는 전력을 다해 일할 가치가 있는 소중한 업이다. 신사의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을 찍은 사진들은 남들에게는 별 가치가 없겠지만 히라야마에게는 삶의 소중한 기록이다. 

 

물론 이같은 일상의 소소한 행복이라는 것도 겉보기처럼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언제든 루틴을 뚫고 우리를 아래로부터 집어 삼키려는 삶의 중력들을 이겨내야 한다. 때로 삶의 저항을 뚫고 나가야 하고 역풍을 거슬러야 하며, 강력한 스트레이트 펀치를 맞고도 쓰러지지 않고 비틀거리며 전진해야 한다. 사람들과도 지나치게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소통의 끈을 놓치 않는 삶의 기예를 갖추어야 겨우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자전거를 타고 가다 비를 맞기도 하고, 손에 오물도 묻히고, 모욕을 당하기도 하고, 기대를 배신당하기도 하고, 불쑥 손길을 내미는 타인을 거부하기도 하고, 예고 없는 손님을 자기방에 들이기도 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돌발 사건들, 매끄러운 루틴의 흐름에 파문을 일으키는 우연들이, 반복되는 일상에서 차이와 긴장, 설렘을 일으켜 삶을 다채롭게 만든다. 이러한 차이들이 가져오는 의외성이 동일성의 단조로움을 밀어내는 미세한 힘이다. 헤겔처럼 달라보이는 것이 사실은 같은 것이라는 동일성의 철학을 가진다면 당신은 권태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 비트겐슈타인처럼 같아보이는 것이 사실은 다른 것이라는 차이의 철학을 가진다면 당신은 권태를 이겨낼 가능성이 높다. 히라야마는 후자이다. 그는 일개 화장실 청소부지만 히라야먀는 노동 바깥에서만 자기를 긍정하고 노동 속에서는 자기를 부정하는, 마르크스적인 소외된 노동을 하는 노동자는 아니다.  건성으로 일하는 후배와는 달리, 노동일을 긍정하고 그에 전념한다. 시지프스의 단조로운 노동 속에서 지루함을 느끼는 후배와 달리, 히라야마는 화장실 청소에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유전자 변이를 타고난 것일까? 그보다는 장인의 자세를 견지하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곳까지 변기 구석구석 닦는 그의 모습은. 롱펠로우의 시를 떠오르게 한다.

 

더 오래전 예술의 시대에는
건축가들이 최고의 세심함을 기울여 공들여 만들었지
매 순간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도,
신들이 모든 곳에 계셨으므로.

 

물론 영화에는 속임수가 있다. 히라야마의 삶이 마치 거의 매끈하게 흘러가는 것처럼 보이게 착시효과를 만들어냈다. 히라야마는 늙었지만 일단 키가 크고 잘생겼다. 술집 여주인도 다른 남자들에게는 관심이 없고 히라야마에게만 은근한 눈빛을 보낸다. 후배의 여자친구조차 못생긴 후배 청년이 아니라 늙은 히라야마의 뺨에 뽀뽀를 한다. 히라야마가 못생긴 키작남이었다면 영화의 아우라는 약간은 달라졌을 것이다. 히라야마는 청소부이지만 독서와 화초 키우기 같은 고급 취미를 가졌다. 술집 여주인의 전남편처럼 불치병에 걸리지도 않았다. 그는 아직 건강하고, 우울증도 없다. 영화에서 전제되고 있는 이러한 조건들은 사실은 어느 정도는 희귀한 것이다. 그래서 가이야 미에코가 말한 '별일 없이 평온한 매일을 보내는 사람'은 사실 평범해보여도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 

 

세상에는 매일 아침 눈을 떴을 때 잠에서 깼다는 사실 자체가 견딜 수 없이 두려운 사람들이 있다.‘아, 오늘도 하루를 살아내야 하나’하는 생각에 몸을 일으킬 힘도 나지 않는 사람들. 참을 수 없는 고통과 슬픔, 몸이 잘려나가는 듯한 고독과 외로움, 끝없는 허무와 권태를 느끼면서 자신에게 ‘왜 살아야 하나, 무엇 때문에……’묻지 않을 수 없는 사람들. 가령 완치가 어려운 병에 걸린 사람, 소중한 사람을 잃은 사람, 모든 것을 걸고 노력했던 일이나 이상에서 좌절을 맛본 사람, 자신이 저지른 죄로 고통받는 사람, 홀로 인생의 뒷골목을 걷는 사람들." (가미야 미에코 ≪이키가이≫ 9쪽)

 

히라야마의 삶엔 일상을 파괴할 전쟁이나 정치적 혁명 상황도 발생하지 않았는데, 이 또한 역사상 모든 개인이 얻는 행운은 아니다. 주인공 히라야마는 알게 모르게 어느 정도는 행운아였던 셈이다. 

 

이 영화에서 히라야마가 가끔씩 루틴이 뚫렸을 때 느끼는 존재의 근원적 기분은 불안이 아니라 회환으로 보인다. 히라야마의 과거는 나오지 않지만 삶의 의미를 한 번쯤 상실한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사는 보람을 잃었다가 다시 찾은 사람 특유의 잔잔한 관조와 슬픔, 세상사에서 한 한발짝 쯤 덜어져서, 살짝 몸을 비켜서서 바라보는 초연함이 묻어나온다. 가미야 미에코에 따르면, 한번 사는 보람을 상실한 사람이 이를 다시 찾는 데는 몇 가지 길이 있는데, 그 중 중요한 게 자연과 예술이다. 히라야마가 즐기는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과 화초 키우기는 자연을 나타내고, 사진 찍기와 노래 듣기, 책 읽기는 예술을 나타내는데, 바로 이것들이 사는 보람을 되찾는 전형적인 매개체다. 삶의 의미를 한 번 크게 상실했다가 되찾은 히라야마에게는 더 이상 거창한 인생의 의미 따윈 관심사가 아닐 것이다. 소박한 이키가이로 충분하다. 그 정도면 되었다.

 

이 영화는 "삶의 의미가 없어도 사는 보람은 있을 수 있어!"라고 말한다. 어쩌면 사는 보람은 삶의 의미의 맹아적 형태이다. 삶을 지나치게 넘어서지 않는 가치에 견고하게 머무르는 것. 그것은 한편 삶의 의미가 가지는 허황됨의 위험이 없는 견실한 토대를 가지지만, 또한 사는 보람의 한계이기도 하다. 자신과 자기 주변에 충실하지만, 자기를 초월하는 더 큰 기획에는 참여하지 않는다는 한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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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삶의 의미'라는 직접적인 표현을 사용하고 있지는 않지만, 삶과 의미를 조합하는 착상의 초기 사례로 꼽히는 것은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에 나오는 구절이다.

 

"삶이란 한낱 걸어다니는 그림자.  

무대 위에서 한때 뽐내고 안달하다가 더는 들리지 않게 되는 가련한 배우.

그것은 바보가 지껄이는 이야기

요란하고 격렬할 뿐, 아무 의미도 없다."

(Life's but a walking shadow, a poor player

That struts and frets his hour upon the stage

And then is heard no more: it is a tale

Told by an idiot, full of sound and fury,

Signifying nothing.)

 
여기서 '의미'로 사용된 단어는 meaning이 아니라 signifying인데,
이 구절을 1765년 독일어로 번역할 때 Sinn을 사용하게 된다.
Sinn은 영어의 Sense(감각, 의미)에 해당되는 말로, 독일어로 처음 쓰인 삶의 의미라는 용어는 Der Sinn des Lebens이다.
그리고 독일어 Der Sinn des Lebens가 나중에 칼라일에 의해 영어로 역수입될 때 the meaning of life가 된다.
 
여기서 눈길을 끄는 점이 몇 가지 있다.
첫째는 삶을 의미와 연결시키는 초기 작업이 철학이 아니라 문학에서 비롯되었다는 점.
이것은 독일의 낭만주의 시인 노발리스가 "삶의 의미(Der Sinn des Lebens)"라는 표현의 창시자라는 것에서도 발견된다.
(노발리스가 1797-98년 사이에 쓴 비출간 단상의 "Nur ein Künstler kann den Sinn des Lebens erraten"
"오직 예술가만이 삶의 의미를 이해할 수/알아낼 수 있다."라는 구절이 '삶의 의미'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역사상 최초의 문헌이다. 참고로 독일어로 '삶의 의미'의 다른 표현인 Lebens Sinn(=Life's meaning)을 쓴 것은 1796년의 괴테인데, 이 표현은 Sinn des Lebens만큼 통용되지는 못했다.)
 
둘째는 첫번째와 연결되는데, 문학에서 바라보는 삶은 이야기 또는 텍스트에 비유되며,
이처럼 삶을 이야기로 비유하는 것에서 삶과 의미를 조합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이야기를 구성하는 것은 언어이며, 언어야말로 의미의 원초적 담지자이기 때문이다.
즉 '삶의 의미'는 사실 비유적 표현이지만, '언어의 의미'는 비유가 아니라 실제적 표현이다.
삶을 이야기(언어)로 비유한 이후에야 언어의 속성으로서의 의미가 삶의 속성으로서의 의미로 전이되는 현상이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즉 삶의 의미라는 표현이 보편적으로 받아지고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삶을 이야기 혹은 텍스트로 비유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처럼 삶을 이야기로 바라보는 문학적 관점에서 삶의 의미라는 표현이 탄생했다는 사실로부터 우리가 이끌어낼 수 있는 통찰은 무엇인가? 노발리스가 삶의 의미를 예술가만이 이해할 수 있다고 했을 때, 그것은 철학적이지도 과학적이지도 개념적이지도 이성적이지도 않은 것임을 보여준다. 그것은 신비적인 것이다. 비유적인 것이며, 애매한 것이며, 다의적인 것이며, 감성적인 것이다. 삶의 의미는 태생적으로 명료성과는 거리가 있으며, 중의적인 것을 부러 추구하는 것이다. 예술가가 이해하는 삶의 의미는 과학자가 이해하는 생명의 의미가 아닐 것이다. 그것은 해석학적 이해에 가까운 것이다. 우리가 삶의 의미를 물을 때 느끼는 막연함은 그 용어의 창조자(=시인)에 의해 어느 정도는 의도된 것이다. 왜 삶의 목적이나 삶의 가치라(예나 낭만주의자의 일원인 슐라이어마허가 1792년에 <삶의 가치에 대하여>라는 책을 발표한다)는 표현을 제치고 삶의 의미가 승리하였는가? 그것은 삶의 의미가 삶의 목적이나 삶의 가치보다 시적인 표현이기 때문이다. 삶의 의미는 삶의 목적과 삶의 가치를 자신의 내부에 품으면서 그 이상의 뜻을 담는 더 중의적인 표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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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영어권에서 인생의 의미와 관련해서 눈에 띄는 논의는 인생의 의미(meaning of life)와 인생 속 의미(meaning in life)를 구별하는 것이다.

 

인생의 의미는 추상적 전체로서의 인생의 의미를 말하는 것이고, 인생 속 의미는 개인들이 각자의 삶을 살아가면서 추구하는 구체적 의미들을 말하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논의는 이 둘을 구별하지 않아서 혼동을 일으키는 측면이 있긴 했다. 인생의 의미를 부정하는 허무주의자의 주장을 개인들의 소소한 의미들을 가지고 부정할 때 사실 이 둘은 대화를 하는 게 아니라 평행선을 긋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줄리언 바지니의 <러셀 교수님 인생의 의미가 도대체 뭔가요?>에서 인생의 의미가 없다는 주장에 대해 'It means a lot to me'라는 용법이 가능하다는 근거를 가지고 논박했을 때 그가 염두에 둔 것이 바로 인생 속 의미라 할 수 있다. 비록 바지니가 '인생 속의 의미'라고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고 '인생의 의미'라고 했지만 말이다.

 

허무주의자들이 인생 속 의미까지 반박하느냐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쇼펜하우어의 경우 인생의 소소한 불쾌함을 장황히 나열하는 것으로 봐서는 인생 속 의미까지 부정하고 싶어하는 속내를 가진 것으로 보이기는 한다. 하지만 대표적 반출생주의자 David Banatar 역시 '인생 속 의미'까지 부정하지는 못한다. 그가 부정하는 것은 '인생 속 의미'가 아니라 '인생의 의미'다. 그는 인생의 의미를 '궁극적 의미'와 같은 뜻으로 쓴다. 

 

meaning in life라는 개념의 도입은 인생의 의미를 부정하고자 하는 허무주의자들과의 전투 속에서 개인적이고 구체적인 의미의 영역이 낙관주의자(?)들을 위한 최소한의 교두보로 확보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인생의 의미를 넘어 인생 속 의미까지 부정하고자 하는 허무주의자들에게 남은 논리는 무엇인가? 인생 속 의미는 우리가 찾는 인생의 궁극적 의미가 아니라느니, 아니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가 아니라 허상에 불과하다느니 하는 정도일 것이다.

 

아마 인생의 궁극적 의미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궁극적 똥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사람들은 궁극적 똥 같은 것이 없다는 것은 쉽게 이해하고 수긍하지만, 인생의 궁극적 의미는 꼭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을 가진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철학적 질병의 사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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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vid Benatar의 Human Predicament의 서문에서 그는 "What is it all about?"이라고 묻고는

그 대답은 "ultimately nothing"이라고 답한다.

인생이 궁극적으로는 무의미하다는 말은 어딘지 옹색하게 들린다.

'무의미하다'라는 말 앞에 '궁극적으로'라는 제한 사항을 걸어둔 데서 눈치챌 수 있다.

이 말은 인생이 '궁극적이지는 않은 범위에서는'  유의미하다는 전제를 함축한다.

극소수 사람을 제외하고는 이 정도의 의미만으로도 살아가는 데 별 지장은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궁극적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죽은 다음에 지구가 멸망하든 말든...같은 태도를 포함하여,

일상의 소소한 만족을 구하는 평범인들과,

인생을 무심한 눈으로 관조하는 달관자에 이르기까지

절대적 의미, 궁극적 의미가 없이도 대부분은 잘 살아간다.

 

인생은 우주적 관점에서는 무의미하다(?)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태양계 밖으로 탐사선을 보내고, 화성 거주를 추진하는 현재의 인류는

1천년 전의 인간에 비해서는 우주적으로 유의미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무의미하다고 치자.

인생이 우주적 관점에서 무의미하다고 치자.

 

그러나 당신의 스케일은 우주적이지 않다.

당신은 인간의 스케일 속에서 살고 있다.

당신의 사고는 가끔 우주적일 수 있겠지만 당신의 삶은 인간적 스케일을 초월할 수 없다.

따라서 인생은 당신의 스케일에서는 충분히 유의미하다.

 

인생이 궁극적으로 무의미하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케인스처럼 우리는  장기적으로는 모두 죽는다고 대답할 수 있다.

또는

"인생은 궁극적으로 무의미하다"라고 말하는 것이 유의미한 존재는 궁극적 존재뿐이다.

 

ps. 인류의 생활양식이 우주적 스케일에서 작동할 때 비로소 인생의 우주적 의미가 부각될 것이다.

불과 200년 전에 인류의 삶은 지구적 의미를 가지지 못했다.

지금은 인류세라는 지질학적 시대명을 만들 정도로 인간은 지구의 운명에 영향을 행사하게 되었다.

즉 인간의 삶이 지구적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는 주장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일론 머스크의 화성 이주 계획을 볼 때, 앞으로 100년 후에는 인간이 적어도 태양계적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기술발전의 측면에서 볼 때 인간의 삶이 우주적으로 무의미하다는 주장은 현재 기준의 제한적 관점일 뿐이다.

SF적 상상 속에서 인간의 삶이 앞으로도 우주적으로 무의미하지는 않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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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의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이라는 아이디어를 삶의 의미 문제에 적용해보자.

생산력이 발전하여 현재의 생산관계가 그것을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될 때가 혁명이 발생하는 시기이다.

이때 생산관계는 생산력의 질곡으로 작용한다.

 

마찬가지로 우리 의식의 생산력이 발전하여 우리 뇌가 그것을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발생하는 것이

삶의 의미라는 문제이다.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는 삶만으로 인간의 자의식을 만족시킬 수 없다.

이때 자의식은 인간 육신의 한계를 초월하려는 시도를 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트랜스휴머니즘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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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은 무엇에 관한 생각이라는 현상학의 주장을 빌어와서

의미는 무엇에 대한 의미라는 주장을 할 수 있다.

밑도 끝도 없이 인생은 의미가 있는가를 묻는 것은 대략 난감이다.

제대로 된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은 삶이 무엇에 대해 의미 있는가를 묻는 것이다.

나의 삶은 내 가족에게는 의미가 있다.

세종대왕은 조선과 한국에 의미가 있다. 미국에는 별 의미가 없다.

나의 삶이 연결된 곳에 긍정적 가치를 제공할 때 내 삶은 의미가 있다.

의미는 가치의 공급원으로 나타난다.

그런 면에서 행복은 의미가 아니다.

가치의 생산이 아니라 가치의 소비일 뿐이므로.

따라서 테일러의 시지프스는 무의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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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한 공간의 영원한 침묵이 나를 전율케 한다."

파스칼 때부터 이미 우주와 삶의 의미를 연결시키는 착상의 싹을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착상은 보통 허무주의적 감정으로 귀결되는 경향을 띤다.

이 때의 우주는 무한, 영원, 침묵, 어둠, 차가움으로 표현되는,

카뮈식으로 말하자면, 나에게 무관심한 낯설고 적대적인 타자의 느낌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왜 우리는 자기 주변의 소소한 일상에서 삶의 의미를 찾지 않고

저 멀리 안드로메다에서, 우리 우주를 넘어 다중우주에까지 가서 삶의 의미를 찾는 경향을 보일까.

그것은 우리가 쉽게 빠지는 근본주의적, 환원주의적 성향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즉 세상의 근원을 원자에서 찾는 것과 비슷한 성향이 삶의 의미를 우주에서 찾는 태도와 연관되어 있다.

 

그런데 근본적인 것을 추구할 때 보이는 환원주의적 입장을 생각해 볼 때

우리는 왜 삶의 의미를 원자에서 찾지 않고 우주에서 찾는 것일까.

재미있는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것은 아마도 노직이 말한대로 의미가 자신보다 큰 가치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나타나기 때문일 것이다.

내 삶의 의미는 나 삶보다 작은 어떤 것이 아니라 더 큰 어떤 것에서 찾는 것이 자연스럽다.

내 삶의 의미는 나의 발가락이라고 하면 우습다. 최소한 나의 가족 정도는 되어야 들어줄 만하다.

 

따라서 의미 찾기는 자신보다 작은 것을 찾아가는 원자를 향한 환원주의가 아니라

자신보다 큰 것을 추구하는 자연스런 생각의 흐름 속에서 우주를 향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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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의미를 찾을 때 우주 속에서 인간의 의의가 무엇인지를 궁금해하는 경우가 있다.

물론 우주에서 인간이 차지하는 의의가 있을 것이다.

예컨대 창조주가 염두에 둔 목적 같은 것.

그것은 기독교 식으로 인간이 지구의 지배자가 되는 것 같은 그럴싸한 것일 수도 있고,

SF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외계인을 위한 에너지 공급원의 역할 같은 비참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게 있다 해도 그것이 인간 삶의 의미 전부를 규정한다고 볼 수 없다.

 

회사를 예로 들어보자.

회사는 돈을 벌려고 나를 직원으로 고용한다.

나는 돈을 벌려고 노동력을 제공한다.

여기에는 자본과 노동 사이의 가치 교환이 있지만,

회사의 목적과 나의 목적이 꼭 일치하는 건 아니다.

물론 회사는 최대한도로 나의 노동력을 착취하려는 경향을 보이겠지만

나는 최대한 월급루팡짓을 하면서 회사의 자원을 나의 사적인 목적을 위해 빼돌리려고 할 수 있다.

서로 다른 속셈으로 공생하는 것이다.

 

삶의 의미도 그렇다.

우주 또는 생태계 전체에서 인간이 존재하는 의미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생태계의 입장과 인간의 입장은 다를 수 있다.

생태계의 목적이 곧 인간의 목적은 아니다.

생태계의 목적을 위해 인간이 사라져줘야 한다고 할 때, 인간이 순순히 사라져주지 않을 것이다.

생태계의 목적에 저항할 것이다.

 

따라서 인생의 의미를 찾기 위해 신 또는 우주가 생명을 만든 까닭을 알려하는 게 정답이 아닐 수 있다.

참고자료일 뿐이다.

회사가 무슨 의도를 가지고 우리를 채용했든, 우리는 우리만의 목적이 있다.

겹치는 부분이 있지만 동일하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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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의 의미'라는 말은 이상하다.

'연필의 기능', '연필이 만들어진 목적'은 가능하다.

반면 '인생의 기능'은 이상하다.

'인생의 의미', '인생의 목적'은 가능하다.

비트겐슈타인적 상황이다.

겉보기 형식은 똑같지만 내재적 문법은 다르다.

연필과 인생은 다른 문법을 사용한다.

 

어떤 사람이 "길가의 꽃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돌멩이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없다. 마찬가지로 삶에도 의미 따위는 없다?"라고 주장할 때, 그 사람은 '삶의 의미'의 문법이 '연필의 의미'의 문법과 동일한 문법을 따른다고 (잘못) 전제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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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의미가 인간이라는 존재가 존재하는 한 가질 수밖에 없는 보편적인 형이상학적 질문이라는 전제는 잘못된 것이다. 삶의 의미라는 문제는 18세기말 서양 근대의 특수한 역사적 조건 속에서 생겨난 특수한 질문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근대과학의 발전과 기계론적 유물론이라는 세계관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허무주의에 대한 반작용에서 나온 것이 인생의 의미라는 낭만주의적 테마이다.

 

1798-99년 사이 언젠가 독일 낭만주의 시인 노발리스가 처음으로 삶과 의미를 연결하였다.

Sinn des Lebens.

왜 삶의 의미는 낭만주의를 뿌리로 하는가?

프랑스 계몽주의의 형이상학적 기반인 결정론적 유물론에 반하여 나왔기 때문이다.

 

결정론적 유물론은 신의 죽음을 불러왔고

신의 죽음이 초래한 절대적 가치의 진공상태에서 허무주의에 직면하게 되면서

궁극적 가치로서의 삶의 의미에 대한 요구가 필연적으로 떠오르게 된 것이다.

 

즉, 삶의 의미는 역사적으로 신의 죽음에서 비롯된 것이고,

따라서 신의 대체물을 찾는 가치를 탐색하는 행동으로 나타나게 된다.

 

근대의 가치로 떠오른 행복, 사랑, 돈, 성공, 국가, 자아실현 등등의 후보들은

삶의 의미의 단독적 가치로서 신을 대체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그리하여 줄리언 바지니 식의 Placeholder 모델이 나오게 된다.

 

어떤 것이 신을 대체할 정도가 되려면 그만큼 추상적이고, 무한해야 한다.

결론은?

인간이 신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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