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의미를 찾는 일의 99%는 질문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는 일이다. 삶의 의미를 묻는 이들은 사실 자기가 무엇을 묻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지 못하다. 그래서 질문의 애매함을 명료한 질문으로 바꾸는 일이 전체의 99%이다. 질문이 명료하게 이해되면 답을 찾는 일은 쉽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문제가 해결됨으로써 얻는 것이 얼마나 작은 것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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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의미 문제는 인생에서 근본문제인 것처럼 얘기되지만(카뮈의 시지프 신화), 실은 그렇지 않다.

이 문제는 돈이나 연애, 기타 문제와 더불어 인생에서 겪는 또하나의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돈의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연애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인생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듯이, 삶의 의미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해서 인생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인생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단 하나의 근본 문제, 그런 것은 없다.

인생 문제의 구조는 중앙집권형이 아니라 지방분권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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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의미 문제는 내가 무언가를 찾고 있는데 그것을 어디에서 찾을지 모르겠다, 여기저기 찾다보면 나오지 않을까, 하는 보물찾기 문제가 아니다. 이 문제는 내가 찾는 게 무엇인지부터가 불명확한 문제이다. 답변이 보물인지 아닌지 알 수 없고, 답변을 찾기 전에 질문을 제대로 던지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써야 하는 문제다. 의미의 의미가 불확정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의미의 의미가 확정되는 순간 문제 자체가 소멸될 수 있는 문제다. 우리가 문제를 제대로 보는 순간 해결이 더 이상 필요가 없어진다. 마치 학업을 마치면 학교를 졸업하듯, 우리는 삶의 의미라는 문제를 졸업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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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의미를 탐구할 때, 우리는 인지적 해법을 찾는다고 생각한다. 삶의 의미에 대한 어떤 진리값이 있는 명제를 찾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는 진리값이 없는 치료법을 얻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톨스토이가 신앙에서 삶의 의미를 찾은 것은 진리와는 무관한 심리적 치유법이다. 마치 플라시보 효과와 같다. 그나마 낫게 평가한다면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또 하나의 삶의 양식을 찾은 거라고 할 수 있다.


심리학에서 인지 치료가 여러 치료법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듯, 삶의 의미에 대한 해답에서 진리값을 가지는 해답은 여러 대응책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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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라고 어떤 홍상수 영화에서 한 영화학도가 선배에게 묻는다. (제목을 찾아보니 <잘 알지도 못하면서>다.) 선배는 난처해하며 생각하다가 자유라고 말한다. 그런데 한참 술마시다가 나중에 다른 사람이 질문할 때에는 또 다른 걸 말한다. 그러자 앞서 질문했던 후배가 아까는 자유라고 하더니라고 따진다.


본질이 없다면 애초에 질문이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본질이 없다면 어떤 하나의 속성이 창작이라는 행위에서 가장 중요한 속성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창작이라는 개념은 어떤 한 사람이 독재적으로 만든 게 아니라 그 개념이 형성되는 역사적 과정에서 복수의 참여자들이 관여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자유라든지, 주제라든지, 아이디어라든지, 독창성이라든지 등등 창작에 연관된 복수의 하위 요소들을 그 개념 속에 포함시켰을 것이다. 이러한 복수성은 창작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개념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개입된다. 그래서 언어의 사회성이라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이 질문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어설픈 것이다. 창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객관적으로 묻는 것인지, 아니면 가장 중요한 것이 뭐라고 생각하는지를 주관적으로 묻는 것인지가 분명하지 않다. 실은 질문하는 사람도 자기가 무엇을 묻는지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지 못하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하는 질문이다. 도대체 말할 수 있는 것은 으르렁거리는 소리로 말하지 말고 똑 부러지게 말해야 한다는, 비트겐슈타인이 마이트너를 인용한 문구를 떠올리게 만드는 사례다.


본질이 없다면 어떤 개념을 대표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것은 없다. 중요한 요소들 여러 개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만 꼭 찍어내 중요한 것을 제시하라는 요구 자체는 인간이 경제적인 이유에서든 경쟁적인 이유에서든 최고의 것 하나만을 꼽으려는 이상한 성향이 있다는 것을 반영하는 것 외에는 별 가치가 없는 접근법이다. 영화에서 선배가 창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어냐는 질문에 한번은 자유라고 했다가, 또 다른 경우에는 다른 것을 말하는 것이 일관성이 없는 게 아니라 실은 의식하지 못한 채 혹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개념이 품고 있는 의미의 복수성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누가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결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등등의 단 하나의 본질을 묻는 듯한 질문한다면 그에 대한 답을 찾는데 급급하기보다는 그 질문이 제기된 바탕에 깔려 있는 숨은 전제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지적하는 일이 상대방의 기분은 나쁘겠지만 올바른 대답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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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의미란 무엇인가?" 이렇게 플라톤 식으로 본질이나 정의를 물었을 때 우리는 제대로 답하지 못한다. 그래서 마치 우리가 삶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라고 착각하게 된다.


반면 '인생의 의미'라는 말을 어떤 상황에서 어떤 방식으로 사용해야 할지를 안다는 점에서 우리는 인생의 의미를 안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우리는 "인생의 의미가 뭔지 도대체 알 수가 없다"는 식으로 그 말을 사용한다. 즉, 비트겐슈타인 식으로 언어의 사용이 그 의미라고 할 때 우리는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고 있는 셈이다.


이런 면에서 철학은 일종의 사기다. 사람들에게 가짜 질문을 던져서 어리둥절하게 만들어 놓고 빨리 답을 내놓지 못하니까 답을 모르는 것으로 착각하게 만든다. 본질을 묻는 질문은 대부분 가짜 질문이다. 당신이 어떤 정의를 내놓든지 항상 그에 대한 반례를 제시함으로써 당신의 답이 잘못되었다고 논박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가 그러했듯이. 하지만 그것은 답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본질을 묻는 질문과 정의로 답하는 대답이라는 형식 자체가 가지고 있는 원초적 속성이다.


말할 수 없다고 해서 반드시 모르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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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한 곳에도 이르지 못하는, 그저 저자가 읽었던 책들의 주변을 맴도는, 평범한 사유를 글솜씨로 그럴 듯하게 포장한 이런 책들이 자꾸 나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약간의 이론과 약간의 현실과 약간의 감상과 약간의 비판을 그럴 듯한 글재주로 뒤섞어서 팔릴 만한 제목의 말랑말랑한 책으로 요리해냈다.


책을 손에 들자마자 받은 느낌은 예쁘다. 무겁다는 느낌이었다. 컴팩트한 사이즈, 세련된 디자인, 촘촘한 문체와 전개...분명히 요즈음 나온 다른 책들에 비추어 미학적 완성도가 높다. 하지만 사회학 책이 미학을 기준으로 평가되어서야 본말이 뒤바뀐 셈일 것이다.


책을 펼치자마자 벤야민이 어떻고, 베버가 어떻고, 보드리야르가 어떻고, 왜 이리 유명인사 이름주어섬기기가 심한가? 대학초년생들을 위한 책소개 책일까? 어지간한 인문서 독자라면 다 읽었을 만한 책들을 소개하고 있다. 뭐라고 딱히 나쁜 책은 아니지만 나로서는 별로 건질 만한 알맹이가 없다. 다른 사람이 한 얘기를 저자의 문학적 필치로 리라이팅한 정도다.


읽다보니 어떤 표현들이 거슬린다. 영화를 소비한다, 남성을 소환한다. 이런 상투적 한자투...소비는 써서 없앤다는 의미인데, 영화를 본다고 해서 그것을 써서 없애는 것은 아니다. 바람직하지 못한 사용을 '소비'라는 말로 쓰는 버릇을 가지는 사람들이 종종 보인다. 주로 자본주의 상품화 운운하는 사람들이 쓰는 은어인데, 서로 베껴서 이제는 베끼는 건지도 모르고 쓰는 상투어가 되어 버렸다. '호명한다'는 표현도 비슷한 유파의 사람들 사이에서 과잉 사용되고 있다.


이 책은 드레이퍼스의 <<모든 것은 빛난다>>와 읽는 맛이 비슷하다. 논지에 솜씨 있게 말장식을 붙였는데, 그것이 필요 이상으로 과하다. 정확히 말하면 논지과 말장식 사이의 조합 비율이 적절하지 않다. 조미료가 과한 음식을 먹는 맛이다. "장식은 범죄다." 특히 그것이 알맹이의 빈약함을 가릴 때는.



세상물정의 사회학

저자
노명우 지음
출판사
사계절 | 2013-12-30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세상물정 좀 아십니까? 세상물정의 비밀과 거짓말 속으로 뛰어든 ...
가격비교


더욱이 문제는 장식이 비용으로 전가된다는 점이다. 이 책의 사이즈는 140*210mm로 일반 판형인 152*225mm보다 작다. 행 길이는 95mm이고, 22행에 불과하다. (보통은 100mm, 24행이다) 아래 여백이 무려 40mm다. 여기에 컬러 일러스트 몇 장을 삽입했다. 일반 판형으로 했으면 260페이지로 만들 수 있는 책을 가벼운 에세이 형식의 디자인을 채용하여 308쪽으로 만들었다.(따라서 30-40쪽 가까이 종이비가 추가로 든다. 게다가 100g짜리 두꺼운 종이를 썼는지 무겁기까지 하다.) 그래놓고 가격은 묵직한 인문사회과학서 값인 16,800원이다. 책의 지식가치로만 보았을 때 이 가격은 분명 과하다. 책의 예상 판매량을 고려했을 때에는 더더욱 그러하다. 14500원으로 했어도 충분했을 터인데, 장식값 명목으로 2천 원 이상이 더 붙었다. 아이스커피에 얼음 몇조각 넣고 500원 더 받는 것과 마찬가지 상술이다. 더욱 씁쓸한 것은 표지는 마치 환경 문제에 의식있는 저자임을 암시하는 듯 재생용지인 것처럼 보이는 종이를 표지로 썼다. 어쩐지 보보스적인 느낌을 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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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언 바지니는 [빅퀘스천]에서 사랑이 인생의 의미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사랑은 인생의 의미이다. 비록 인생의 의미가 사랑인 것은 아니지만. 즉 사람은 동물이다. 비록 동물이 사랑인 것은 아니지만. 그런데 바지니는 인생의 의미가 사랑이 아니라는 이유로, 사랑이 인생의 의미가 아니라는 잘못된 결론으로 빠지고 있다. 모든 개인들이 추구하는 각각의 가치는 그것이 사랑이든, 신이든, 성공이든, 인생의 의미가 될 수 있다. 단, 그것은 어느 것도 인생의 유일한 의미는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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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뮈의 부조리 논증이 허술함을 지적하는 네이글의 논증은 매우 날카롭지만 다른 한편으로 얄팍해보이기도 한다. 카뮈의 시지프스는 모호하지만 심오해보이는 반면 네이글의 외부적 관점은 명료하지만 깊은 맛이 없다. 철학의 논증은 문학의 통찰보다는 작은 그릇인 듯하다. 특히 분석철학이 그렇다. 명료함을 얻기 위해서는 풍부함을 포기해야 한다.


물론 대부분의 심오함은 얕은 물을 가리기 위해 물을 흐려놓은 속임수에 불과하다. 불명료한 언어를 가지고 확신있게 논변을 전개하는 카뮈의 스타일리쉬한 문체는 분석철학적 취향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풍부함의 징표라기보다는 흐린 물에 가려진 얄팍한 깊이라는 의혹을 일으킨다. 그런데 반대로, 대부분의 철학적 논증은 정서가 메마르고 이성이 지나치게 비대한 자들의 얄팍한 자기확신에 불과한 것일 수 있다.


장자의 철학은 문학적 상상력 속에 녹아 있다. 읽는 재미가 있고 풍부한 통찰을 준다. 반면 장자에 대한 철학 논문은? 일단 재미가 없으면서 논리적 분석으로 일관한다. 사실은 분석 수준에도 못 미치는 요약 및 리라이팅이 더 많기는 하지만, 아무튼 완벽하게 논리적으로 분석해냈다고 하자. 그럴 때 무엇이 문제인가. 완벽한 분석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지게 만든다는 점이다. 이것이 왜 문제인가? 사람들은 계속해서 떠들고 싶어하는 반면 논리적 분석은, 완벽하게 수행되는 경우에, 대화를 종결시키기 때문이다. 논리적 분석이 더 이상의 대화를 이끌어내는 경우는 그것이 불완전할 때뿐이다. 반면 문학적 상상력이 대화를 이끌어내는 것은 그것이 풍부하기 때문이다. 논증은 상호작용을 축소하는 경향이 있다. 사람들이, 심지어 일부 철학자들마저 논증을 기피하는 이유의 일부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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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가 인간의 의미 요구에 대해 무관심하고 냉담하다는 카뮈의 주장에 대해.


1. 우주가 우리에게 냉담하다고? 노자가 2500년 전에 벌써 깨달은 걸 가지고 이제 와서 새삼 무슨 충격이라도 받았다는 말인지...

네가 바라는 게 도대체 무엇인가? 너의 부모와 자식, 친구들은 너에게 냉담하지 않다.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무엇을 더 바라는가? 왜 너의 가족과 친척과 친구 뿐만 아니라 우주까지 통째로 나서서 너 따위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말인가.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과욕이거나 어리광이 아닌가. 너는 지나가는 개가 너에게 관심을 갖지 않고 냉담한 것에 대해서도 충격을 받는가? 지나가는 개의 무관심에 대해 충격을 받지 않는다면, 저 광대한 우주의 무관심에 충격을 받을 이유는 무엇인가.


2. 너의 가족, 친구, 연인은 너에게 무관심하지 않다. 그런데 실은 너의 가족, 친구, 연인도 우주의 일부다.
따라서 우주가 인간의 의미 요구에 대해 무관심하고 냉담하다는 주장은 옳지 않다.

최소한 우주의 일부는 너에게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있다.

문제는 우주 전체가 너에게 관심을 가져야만 만족할 수 있다는 너의 과욕일 뿐이다.


3. 카뮈의 주장은 가족, 친구, 연인 따위의 사소한 존재들의 관심은 대단하지 않다는 것.

기독교의 신처럼 우주 전체를 대표하는 전지전능한 인격체의 관심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절대적인 것, 궁극적인 것, 무한한 것에 대한 욕구이다.

의미에 대한 요구는 마치 자본의 무한증식처럼 계속해서 더 큰 것을 요구한다.

노직이 말했듯히 무한한 자기초월이다.

의미는 궁극적으로 무한을 지향한다. 일종의 질병이다.


4. 물질의 궁극적 상태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절망하고 좌절하고 자살까지 고민하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삶의 궁극적 의미와 관련해서는 절망하고 좌절하고 자살까지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은 삶의 의미를 추구할 때의 마음가짐이 과학적인 호기심을 추구할 때의 마음가짐과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마치 엄마를 찾는 아이의 마음과 같다. 절대자와 떨어져있음을 견디지 못하는 분리불안 같은 것.

즉, 정신적 미성숙의 징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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