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주의적 관점에서 삶의 의미가 삶 자체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생명을 둘러싼 외부의 상위체계 속에서 생명의 용도, 쓰임에 대한 유의미한 맥락화 논리를 찾아내야 한다. 의미는 더 넓은 가치의 네트워크 속으로 자기를 초월하는 것이라는 노직의 전제에서 볼 때 생명의 바깥은 물질적 우주다(좀더 세분화하면 '생명-생태계-우주-존재'로 넓어진다). 따라서 논리적으로 볼 때 생명의 의미는 물질적 우주 (혹은 존재) 속에 있다는 가설을 세워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약간의 혼란이 발생할 수 있다. 우리의 상식적 관점에서는 생명과 생명을 둘러싼 물질적 우주를 대비했을 때 물질보다는 생명이 가치가 있다고 보기 때문에 물질적 우주가 생명의 의미가 될 수 있느냐가 의심스러워지기 때문이다. 노직의 유기적 통일성을 가치로 정의했을 때 생명이 생명을 제외한 우주보다 유기적 통일성이 더 높기 때문에 더 가치있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러면 어떤 것이 삶의 의미가 되기 위해선 그것의 가치가 삶보다는 크거나 최소한 같아야 하는데, 우주는 물질이기 때문에 생명보다 더 가치있다고 말하는 것은 분명 어색하게 느껴질 뿐 아니라 논리적으로도 오류가 된다.


이 난점을 해소하는 방법으로 이런 방식을 생각해볼 수 있다.(정확히 말하면 이것은 난점은 아니고 난점인 것처럼 착시를 불러일으킨 것이다). 어떤 것이 삶의 의미라고 할 때 그것은 단순히 삶의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을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 즉 초월이 아니라 포월이다. 애초부터 '의미는 더 넓은 가치의 네트워크 속으로 자기를 초월하는 것'이라는 정의에 따르면 의미는 초월적 외부와의 관계가 아니라 포월적 상위체계와의 관계였던 것이다. 이에 따르면 의미가 세계의 '외부'에 있다고 본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은 오류가 될 가능성이 있다. 의미는 세계의 외부가 아니라 더 넓은 세계 속에 있기 때문이다. '세계의 외부'라는 표현은 '세계'를 둘러싸고는 있지만 세계 자체는 포함하지 않는 것, 즉 세계의 여집합으로서의 외부를 배제하지 않으므로 부정확하다. 더 넓은 세계는 대상이 되는 세계를 포함한 더 큰 어떤 것이다. 따라서 의미는  외부에 있는 게 아니라, 상위 체계에 있다. 예를 들어 내 인생의 의미를 가족이나 사회나 국가에 둔다고 할 때, 가족, 사회, 국가는 나를 배제한 외부가 아니라 나를 포함한 더 큰 세계, 즉 상위 체계이다. 


마찬가지로 생명의 의미가 우주에 있다고 할 때 이 우주는 생명을 배제한 물질적 우주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포월하는 우주를 말해야만 했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초두에서 어색하게 느꼈던 비교, 즉 생명이 더 가치있냐 물질적 우주가 더 가치있냐의 질문은 의미를 묻는 질문에서는 성립하지 않는다. 생명의 의미는 물질적 우주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포월하는 우주 속에 있다. 따라서 앞서의 난점은 실제로 난점이 아니라, 우리가 우주라는 말에서 기계적으로 생명을 배제한 '물질적 우주'를 떠올렸기 때문에 발생한 착시였을 뿐이다.


물론 이런 방식의 의미 분석에 대해, 정의상(by definition) 생명의 의미가 생명을 포함한 우주 속에 있다는 빤한 얘기를 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이것은 어쩌면 우리의 일상 언어나 사유가 이러한 경계 부근에서 활동한 일이 별로 없기 때문일 수 있다. 왜냐하면 내 인생의 의미는 가족에게 있다는 표현도 논리적으로 분석하면 의미의 정의상 빤한 얘기일 수 있는데, 우리는 이것을 분석명제가 아닌 종합명제인 것처럼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어찌됐든 이러한 분석으로부터, 생명의 의미는 (생명을 포함한) 우주 속에 있다는 가설이 노직의 유기적 통일성이라는 가치론과 더 큰 가치의 네트워크 속으로의 자기초월이라는 의미론으로부터 논리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히 드러난 것 같다. 즉 논리적으로는 삶의 의미는 삶 자체가 아니라, 삶을 포월하는 우주 또는 존재 속에 있다고 말하는 것이 가능하다. 일단 이것만으로도 삶의 의미가 삶 자체라는 동어반복의 쳇바퀴를 빠져나오는 데는 '철학적으로는' 성공했다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삶의 의미가 우주 속에 혹은 존재 속에 있다는 말의 '실질적' 의미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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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벌레가 삶의 끝이라고 부르는 것을 신은 나비라고 부른다.(리처드 버크)


김대식 교수처럼 삶의 바깥을 사유하지 못하고, 삶의 의미는 삶 자체라고 할 때, 우리는 애벌레의 관점에 머무는 것일 수 있다. 여기서 나비를 굳이 기독교 식으로 내세를 비유하는 거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것도 하나의 가능성일 수는 있지만 여기서는 제외한다. 내세가 없고, 내가 죽으면 낙엽이 되거나 박테리아가 되거나, 원자로 흩어졌다가 다른 생명의 구성물로 윤회한다고 할 때, 이것을 그저 삶의 끝이라고 볼 것이냐 아니면 나비로 볼 것이냐의 문제다. (사실 판단의 문제라기 보다는 가치판단의 문제이다. 하지만 세부적으로 보면 두 가지가 얽혀있다. 나중에 다시 살펴보겠다.) 여기서 개체의 죽음을 그저 삶의 끝이라고 보는 태도가 허무주의고, 나비라고 보는 것이 신의 관점, 즉 삶의 의미를 깨달은 이의 관점이다. 


나의 삶의 끝이 모든 것의 끝인 것처럼 보는 애벌레의 관점을 취했을 때 두 가지 태도가 나온다. 하나는 절망적 허무주의다. 삶에 끝이 있음으로 해서 삶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허무주의에 빠질 수 있다. 물론 이 생각은 논리적 오류다. 영화에 끝이 있다고 해서 영화가 무의미해지는 것이 아니듯, 삶에 끝이 있다고 해서 삶이 무의미해지지는 않는다. 죽음의 절망에 압도당한 잘못된 감정판단일 뿐이다. 또다른 하나는 박이문 교수가 말하는 류의 행복한 허무주의다. 삶에 끝이 있고, 삶의 바깥은 허무이고, 삶은 무한한 허무의 바다에 뜬 작은 섬이지만, 삶 자체는 가치있고 유의미하다는 관점이다. 삶의 의미는 삶 자체라는 생각이 여기에 해당한다. 아마 김대식 교수의 관점도 여기에 해당하는 것 같다. 이 생각은 논리적으로 타당하지만 삶의 바깥을 사유하지 못하는 한계에 갇혀 있다.


왜 우리는 삶의 바깥을 사유하기 힘든가? 제시 베링이 <<종교본능>>에서 말했듯 삶을 살아가는 생명체에게 삶의 외부에 대한 관념은 진화적 관점에서 생존에 별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일까? 내 생각에는 그런 측면도 작용하지만, 비트겐슈타인의 용어로 말해서 대상들 사이의 "연결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삶의 의미를 깨닫는 것은 사실판단과 가치판단이 뒤섞여 있다. 사실판단에서는 정보가 부족하기 보다는(물론 그런 요인도 있지만), 정보들 사이의 연결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 종합적인 가치판단에 제대로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측면이 있다. 물론 모든 정보들과 그 연결관계들을 다 인식하고도 허무주의를 고집하겠다는 사람도 없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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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식 교수가 중앙Sunday에 기고한 칼럼 '삶은 의미 있어야 하는가?'의 앞부분을 보자.

비트겐슈타인은 그래서 '삶의 의미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자체가 논리적으로 무의미하다고 주장했다. 조금 더 생각해 보자. “x의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한마디로 ‘정해진 범위 y 안에서 x의 용도 또는 x가 y에게 줄 수 있는 결과들의 합집합’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벽과 못’이라는 범위 안에서 ‘망치’의 의미는 아마도 무언가를 두들겨 벽에 박을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결국 무언가의 의미란 다른 무언가와의 관계를 나타낸다. 그럼 우리 인생에서 가장 큰 범위는 무엇일까? 그건 바로 삶 그 자체다. 그렇다면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라고 질문하는 순간 우리는 단지 “삶과 삶의 관계”라는 동일한 단어를 반복하는 난센스를 말할 뿐이다.

김대식 교수가 삶의 의미를 부정하는 논리의 핵심은, 의미라는 단어의 의미는 자신의 바깥에 있는 어떤 것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인데, 삶의 의미는 삶의 바깥으로 빠져나갈 수가 없기 때문에 "삶의 의미는 삶 자체다"라는 동어반복의 넌넨스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럴 듯하다. 과연 그럴까?

먼저 김 교수가 삶의 의미가 다의적이라는 것을 잊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도록 하겠다. 김 교수가 말하는 것은 가장 넓은 의미의 '인생의 의미'이다. 즉 인류 전체의 삶 일반에 대한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 차원의 삶의 의미에 한정되는 말이다. 이 경우 의미의 범위가 넓기 때문에 바깥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힘들게 여겨진다(물론 여기에 대해서도 삶의 바깥으로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은 없지 않다. 생명의 의미와 존재의 의미가 그 후보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따로 다루겠다.) 하지만 삶의 의미를 묻는 또다른 방식으로 "내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가능하다. 

추상적인 삶의 의미를 묻는 경우와는 달리 개별적인 삶의 의미를 묻는 경우에는, 삶의 의미의 바깥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쉽게 가능하다. 예컨대 개인의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는 가족, 사회, 역사, 인류, 생명의 의미와 같이 더 넓은 외부의 가치와 관계를 맺을 수 있다. 더 큰 외부의 가치의 네트워크로부터, 마치 의미의 낙수이론처럼, 의미를 전달받는 것이 '논리적으로 가능'하다. 물론 김 교수도 이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많은 독자들은 이렇게 오해할 것이다. 인류 일반에 대해 삶의 의미를 말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면, 개인의 삶의 의미를 말하는 것도 무의미할 것이다, 라고. 아니, 사실은 이 둘을 구별해서 말하는 건지 아닌지도 대부분의 독자들은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그저 '아, 비트겐슈타인이란 유명 철학자가 삶의 의미라는 질문은 논리적으로 볼 때 말이 안 되는 소리라고 했다는 거지"하는 정도로 결론만 취해 갈 것이고 어디가서 누가 삶의 의미에 대해 말하려고 하기만 하면 "야, 삶의 의미라는 건 말이야 질문 자체가 성립하지 않아. 넌센스란 말이지"라고 상대방의 말을 자를 것이다. 

"네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에 대해 "내 인생의 의미는 사회의 발전에 기여하는 것이다."라고 답하는 것은 전혀 동어반복이 아니다. 우리의 생활 속에서 충분히 유의미하게 사용될 수 있는 말이다. 바늘 끝 위에 몇 명의 천사가 춤추느냐를 따지는 것과 다르다. 줄리언 바지니는 인생의 의미가 논리적으로 무의미하다는 주장을 철지난 논리실증주의와 일상언어학파의 잔재로 비판하면서, 인생의 의미의 여러 의미 가운데, "그것은 내게 아주 많은 것을 의미해"에서처럼 "중요한 가치"라는 뜻으로 사용되는 의미는 논리적으로 무의미하지 않다고 반박한 바 있다. 인생은 '내게' 아주 많은 것을 의미할 수 있다. 또는 인생은 '우리에게' 아주 많은 것을 의미할 수 있다. (이에 대한 세부 논의는 줄리언 바지니의 <<빅 퀘스천>>, 211-213쪽 <붉은 청어> 참조) 심지어 인류 전체의 일반적 삶의 의미가 불가능하더라도, 개별적인 삶의 의미는 가능할 수 있다.

물론 논리실증주의자나 일상언어학파가 부정한 의미는 이런 개인적 차원의 의미가 아니라 형이상학적인 의미일 것이고, 김대식 교수가 말한 의미도 형이상학적 의미에 가깝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형이상학적 차원의 의미가 아닌 개인적 차원의 의미를 추구하는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하지 않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개별적 삶의 의미는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을 밝힐 필요가 있다. 형이상학적 수준의 의미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다음에 다루기로 한다.

 


빅 퀘스천

저자
줄리언 바지니 지음
출판사
필로소픽 | 2011-02-15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삶에 의미를 찾는 생각 여행자를 위한 명쾌한 안내서나와 세계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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