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윈 덕분에 인간이 원숭이와 공통 조상을 가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비천한 출신 성분이 밝혀진 것에 화를 내면서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20세기에 제인 구달이 침팬지도 도구를 사용한다는 것을 발견하면서 도구적 인간이라는 개념도 폐기되었고, 또다른 과학자들이 침팬지에게 언어를 가르치는 데 성공하고, 침팬지와 인간의 DNA가 99%의 싱크로율을 보인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유인원과 인간의 본질적 차이를 주장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사고방식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아직도 인간이 '특별'하다는 견해에 찬동하는 과학자들은 마치 인종주의자들처럼 편견을 가지고 있다는 의심을 받는 상황에 이르렀다. 심지어 그것이 과학적 실험 결과일지라도 그 결과를 함부로 발표하기에는 '정치적 올바름'을 따지는 학자공동체의 매서운 질타를 두려워해야 하는 지경으로까지 불과 1세기만에 상황이 반전되었던 것이다. 제시 베링은 이러한 '역편견'에 맞서 인간을 동물과 다른 고등한(?) 존재로 만들어주는 새로운 기준을 제시한다. 그것은 바로 마음이론(theory of mind)이다.

표지 시안.


이 책을 번역하면서 내가 왜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에 상당히 오래 동안 사로잡혔는지도 어느 정도 깨닫게 되었다. 1~3장을 김태희가, 4~7장을 내가 번역했다. 프로번역가 답게 앞장의 문장이 좀더 매끄럽게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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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윤 PD가 알라딘 연재 건으로 인터뷰를 하겠다고 해서 보기로 했는데, 책을 안 읽고 만나기가 그래서 <<그들은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되었다>>를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다보니, 신경숙 편에 고등학교 때 담임 교사인 최홍이 선생의 권유로 소설가의 길로 접어들었다는 얘기가 나왔다. 최홍이 선생 얘기는 예전에 신경숙 관련 기사를 읽다가 얼핏 본 적이 있었는데, 나의 고등학교 시절 작문 선생 성함도 최홍이여서 혹시 같은 사람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그냥 지나쳤는데, 이번에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기억 속의 중년 모습이 백발의 노인으로 변했을 뿐 과연 동일인이어서 갑자기 옛 추억이 떠오른다.

지금 서울시 교육위원으로 계신 모양인데, 80년대 당시에도 상당히 정치적으로 의식 있는 말씀을 많이 하셨던 기억이 있다. 그 때 작문 선생은 두 명이었는데 한 양반은 상당히 보수 꼴통으로서 전두환 얘기만 나오면 '각하께서, 각하께서' 하면서 극존칭으로 부르는 게 당시에도 영 못마땅했었고, 최홍이 선생은 '광주 사태' 관련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친구분이 <오월에 날아온 수상한 꽃가루>라는 시집을 냈는데 어떤 문제가 생겼다는 내용의 말을 한 것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 있었다. 이 시집 제목이 상당히 특이해서 오래 동안 머리 속에 남아 있었는데, 언젠가 남현동의 중고서점 <책창고>에 갔다가 우연히 이 시집을 발견했을 때 옛 기억이 떠올라 기념으로 한 권 사다가 집에 두었다.

최홍이 선생님. 왠 양복?


내 기억으로 그때 아직 머리는 세지 않았고 약간 곱슬내지는 당시 유행하던 파마머리에 베이지색 잠바 차림, 목소리는 상당히 또렷하고 강단 있게 발음을 하였다. 특히 저 칠판의 꾹꾹 눌러쓴 필체가 기억난다. 당시는 워드프로세서가 보급되지 않아서 시험지에 손으로 글씨를 써서 등사기로 복제해서 시험을 치렀는데 작문 시험 하면 꼭 저 글씨체로 문제가 나왔었다. 점수는 대략 88점 정도 맞았던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튼 사소하지만 재미있는 연결고리다.
Posted by 깊은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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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방영된 KTV 인문학 열전을 보니 녹화 분량의 절반 정도가 빠진 것으로 보이는데, 특히 마지막에 허무주의를 논박하는 부분이 축약된 부분이 아쉽다. 어찌보면 끝에서 살린 부분들은 부수적인 내용들이고, 빠진 부분이 핵심인데 녹화할 때 약간 버벅거렸던 부분이라서 빠진 것 같다. 복원하면 다음과 같다:

허무주의의 허술한 논증 가운데 하나는 "인생에 목적은 없다. 따라서 인생은 무의미하다"는 논리다. 의미의 의미는 최소로 잡아도 7가지쯤 된다. 목적으로서의 의미는 그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따라서 1/7이 부정된다고 해서, 전체가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굿바이 카뮈>>에서 의미의 의미로 제시한 것은 로버트 노직이 <<Philosophical Explanations>>에서 전개한 주장을 빌어온 것이다.

1. 인과적 관계로서의 의미
2. 지시적 관계로서의 의미
3. 의도와 목적으로서의 의미
4. 교훈으로서의 의미
5. 개인적 중요함으로서의 의미
6. 객관적 가치로서의 의미
7. 본질적 가치로서의 의미

인생이 무의미하다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위의 7가지가 모조리 부정되어야 한다. 하지만 보통 허무주의자들은 이 가운데 3번 하나만을 부정하는 것으로써 나머지 모두가 부정되는 것처럼 과장하는 논리를 편다. 3번이 가장 손쉽게 속아넘어가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목적으로서의 의미는 통상적으로 신적인 존재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인간과 우주를 창조함으로써 가능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무신론적 입장을 취하면 3번의 의미가 쉽게 부정될 수 있는 것으로 속아 넘어가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신의 목적이 없다고 하더라도 사르트르가 말했듯 개인의 Life Plan을 통해 목적을 확보할 방법은 남아 있다. 설사 3번의 의미가 부정된다 하더라도 나머지 의미들은 건드려지지 않은 채 남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3번뿐만 아니라 1, 2, 3, 4, 6, 7을 모두 부정하는 허무주의도 있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럴 수 있다고 하자. 하지만 그런 경우라도 5번은 개인의 주체적 판단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동의하지 않는다면 절대로 무너지지 않는다. 5번에서 무너질 때 우리는 허무주의에 패배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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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의 어투를 따라 말하자면, 신비한 것은 신이 존재하는가의 여부가 아니라 왜 우리가 신의 존재에 대한 의문을 끊임없이 제기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또한 진짜 미스터리는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이 아니라 도대체 왜 우리가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을 그토록 끈질기게 던지고 있는가 하는 점일 것이다.

이에 대한 제시 베링의 대답은 전혀 신비적이지 않다. 그것은 바로 "마음이론(theory of mind)” 때문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우리가 신이나 영혼, 내세와 같은 종교적 관념을 가지게 된 것이 기독교 등의 특정 종교라는 사회문화적 바이러스에 감염되었기 때문이라는 (리처드 도킨스 식) 논리에 동의하지 않는다. 사회문화적 변수가 작용하기에 앞서, 우리의 뇌가 생물학적 수준에서 신의 존재, 영혼 불멸, 내세 및 인생의 의미 등에 대한 생득적 사유 형식을 탑재하고 있다는 것이다(따라서 종교를 박멸하는 일은 과학교육으로는 불가능하며, 오직 뇌수술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리고 이러한 사유 형식은 우리의 인지 체계가 진화해오면서 획득하게 된 마음이론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진화적으로 자연선택된 우리의 두뇌는 인과적 설명에 입각한 진화론보다는 목적론적 설명에 입각한 창조론을 선호하도록 자연선택되어 있다는 것이 저자의 지적이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말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마음이론이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타인에게도 나와 같이 생각하고 느끼고 의도하는 능력이 있다고 추론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이게 당연한 것이지 뭐가 대단한 능력이라는 것일까? 제시 베링은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사건들이 마음이론이 없다면 어떻게 체험될지 악몽 같은 사례를 통해 보여준다. 어느 식당에 앉아 있는 한 가족의 평범한 저녁 식사를 관찰해보자. 남편과 아내와 어린 형제가 있다. 그 가족의 막내가 형이 괴롭히자 울음을 터뜨린다. 하지만 마음이론이 없을 때 우리에게 보이는 것은 단란한 가족의 저녁식사가 아니라 옷들을 채우고 있고 의자에서 늘어져 있는 피부 자루이다. 그 피부 자루들의 꼭대기에는 쉬지 않고 움직이는 작고 검은 점들이 있고, 그 아래에서 구멍 하나가 더러 소음을 낸다. 그 자루들은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움직이고, 때때로 그것들 중 하나가 우리를 건드린다. 구멍들은 모양이 변하고, 때때로 두 점으로부터 짭조름한 액체가 흘러나온다.”

사실 이 사례는 마음이론보다는 객관적 대상의 실재를 부정하고 감각으로 지각된 것만 진짜 존재한다는 버클리 류 주관적 관념론의 적용 사례에 가까워 보인다. 마음이론이 없다면 일단 다른 사람은 겉보기에는 생각이 있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실제로는 무뇌 좀비인 것처럼 보일 것이다(데카르트가 동물을 정신 능력이 없는 자동기계로 간주했을 때 그는 마음이론을 작동시키지 못했던 것같다. 반면 침팬지에게 사람과 동일한 인격이 있는 것처럼 여겼던 제인 구달은 마음이론을 과다 적용했던 것이 아닐까). 자폐아처럼 주변에 누가 있든지 신경 쓰지 않고 혼자 중얼거릴 것이다. 우리가 고양이 앞에서 거리낌 없이 옷을 갈아 입듯이, 사람들 앞에서도 부끄럼 없이 방귀뀌고 똥누고 섹스를 할 수도 있다.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타인도 나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가정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마음이론에 관한 책이다. 단지 마음이론 하나만을 전제하고 여기에 진화론을 적용했을 뿐인데, 거기로부터 신이 나오고, 영혼이 나오고, 불멸이 나오고, 내세가 나오고, 불멸이 나오고, 운명이 나오고, 인생의 목적과 의미가 나온다. 게다가 도덕과 윤리까지도 나온다. 가히 인간판 만물의 이론이다.

재미있는 것은 침팬지에게는 마음이론이 없거나 아주 미약하다는 주장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론이 분분하지만 저자는 인간만이 진정한 의미의 마음이론을 가진다고 보고 있다. 이에 따라 인간을 정의하는 새로운 기준이 나온다. 인간은 더 이상 도구적 존재도 아니고 언어적 동물도 아니다. 제인 구달과 그녀의 친구들에 의해 침팬지도 도구를 사용하고 인간의 언어를 배울 수 있음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마음이론 뿐이다. 오직 인간만이 타자의 마음을 추론하는 존재라는 것. 심지어 마음이 없는 곳에서도 말이다. 그 결과 신이 생겨나고 영혼이 생겨나고 내세가 생겨나고 종교가 생겨날 수 있었다.

마음이론이 밝힌 신의 정체는 적응적 환상(adoptive delusion)이다. 거의 모든 문화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신 관념은 모든 것을 지켜보고 판단하고 처벌하는 존재로서의 신이다. 이러한 신 관념을 마음이론의 의도하지 않은 부산물로 얻게 된 우리의 선조들은 동물적 유혹의 순간에 쾌락적, 충동적, 이기적 행동을 자제하게 됨으로써 그렇지 못한 개체들보다 사회적 추방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되었고, 그 결과 진화적으로 자연선택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도 같은 결론을 도출할 수 있겠다. 인생의 의미라는 개념을 채택한 개체들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보다 자연선택될 가능성이 높을 수 있을 것이라고. 어떤 측면에서 그럴까.

니체는 왜 사는지 아는 사람(, 인생의 의미를 깨달은 사람)은 어떠한 역경도 이겨낼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이 말을 몸으로 증명한 로고테라피의 창시자 빅토르 프랑클은 삶의 의미를 간직함으로써 자신이 아우슈비츠의 지옥으로부터 생존할 수 있었다고 증언한 바 있다. 어쩌면 이것이 인생의 의미라는 개념을 채택한 개체의 진화적 생존가능성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일 수 있겠다.

제시 베링에 따르면 인생의 의미는 신 개념과 더불어 인간의 마음이론이 범주오류를 일으킴으로써 실제 마음이 없는 곳까지 확대 적용되어 발생하게 된, 하지만 진화적 적응에는 도움이 된 환상일 뿐이다. 그런데 신 개념은 앞으로는 진화적 적응에 별로 도움이 안 될 것 같다. 기술의 발달로 전세계가 감시카메라, 위성사진, 인터넷 정보망으로 뒤덮이고 CSI 식으로 과학수사가 벌어지는 세상에서는 굳이 만인을 지켜보고, 판단하고, 처벌하는 신이 필요치 않다는 것. 신 없이 인간의 기술만으로 지켜보고, 판단하고, 처벌하는 데 아무 문제도 없다는 것. 따라서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발명할 필요가 있다는 볼테르의 말은 시의성을 상실한 시대착오적인 주장이 되어 버렸다. 그렇다면 인생의 의미는? 인생의 의미는 아직 나타난 지 얼마 안 되는 신생 개념이므로 앞으로도 상당 기간 적응적 환상으로서 크게 기여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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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의식은 무를 인식하는 능력을 개발하지 못했다 한다. 왜냐하면 무를 인식하는 것이 진화적으로 생존가치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 존재하는 것이 나에게 해가 되고 이익이 될 수 있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은 나에게 해도 아니고 이익도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굳이 아까운 뇌 자원을 없는 것을 인식하는 능력을 얻기 위해 투입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가 무를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으로부터 어떤 결론이 도출되는가. 우리는 자신의 죽음 이후 무화(無化)된다는 것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에피쿠로스는 이성적 사유를 통해 우리가 죽음을 결코 체험할 수 없음을 깨달았지만, 그 말의 의미를 몸으로 실감하기란 쉽지 않다. 우리는 기껏 죽음이 심연이며, 블랙홀이고, 경험의 종말이며 영원한 무, 존재의 영구적 소멸이라고 생각하지만 이것은 단지 무의 물화다. 그리하여 우리의 마음 이론은 죽음 이후 우리의 육체를 떠난 마음이 이 세상이 아닌 어떤 다른 공간에 (그것이 천국이든 암흑 속의 공간이든) 지속적으로 존재한다는 환상을 가지게 된다. 이것이 바로 내세에서 불멸하는 영혼이라는 환상으로 재구성되어 나타난다.

이에 따르면 내세에 대한 믿음은 종교에서 비롯되거나, 죽음에 대한 공포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진 마음이론의 불가피한 부산물이다. 우리 마음이론은 죽은 이후를 사유하는 데 적합치 않을뿐더러 완전히 실패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의식은 의식을 부재를 의식적으로 체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괴테는 "모든 사람은 자신의 불멸해 대한 증명을 내부에 간직하고 있다"고 말했고, 프로이트는 "모든 사람들은 무의식에서 자신의 불멸을 확신하다"고 말했으며, 영국 시인 존 게이는 1732년 자신의 묘비명에 "인생은 장난이다. 모든 것이 그것을 보여준다. 나는 한때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이제는 그것을 알고 있다."라고 썼던 것이다.

-제시 베링, <종교 본능>


우리는 절대 자신의 죽음을 체험할 수 없기 때문에, 결코 자신의 죽음을 실질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 오직 타인의 죽음만 체험할 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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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의 어투를 흉내내서 말하자면, 참으로 신비한 것은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이 아니라 도대체 왜 우리가 인생의 의미에 대한 질문을 그토록 끈질기게 던지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또는, 신비한 것은 신이 존재하는가가 아니라 왜 우리가 신의 존재에 대한 의문을 끈임없이 제기하고 있는가 하는 사실이다.

이에 대한 제시 베링의 대답을 차두리 식으로 말하면  "간 때문이야"가 아니라 "마음이론(theory of mind) 때문이야"라는 것이다. 즉 우리가 사회문화적 바이러스에 감염되기에 앞서, 우리의 뇌가 인생의 목적, 세계의 의미, 신적 존재에 대한 생득적 사유 형식을 탑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유 형식은 우리의 인지 체계가 진화해온 경로를 반영하고 있는데, 역설적이게도 우리의 두뇌는 인과적 설명에 입각한 진화론보다는 목적론적 설명에 입각한 창조론을
선호하도록 자연선택되어 있다는 것이다. 최소한 아직까지는 말이다.

그렇다면 마음이론이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타인에게도 나와 같이 느끼고 생각하고 의도하는 능력이 있다고 추론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이게 당연한 거지 뭐가 대단한 능력이라는 걸까?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하는 사회적 경험들에 이처럼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즉각 그가 지니는 관념들, 감정들, 생각들로 번역하는 능력(즉 마음이론)이 없다면 어떨지 생각해보자. 발달심리학자 앨리슨 고프닉과 앤드루 멜초프는 <아기들은 어떻게 배울까>(2000)라는 책에서 악몽 같은 예를 들었다. 이 저자들은 우리더러 이렇게 상상해보라고 말한다. 우리는 어느 식당의 식탁에 앉은 손님의 시점을 취해서 한 가족의 평범한 저녁 식사에서 오가는 대화를 그저 관찰하고 있다. 그 가족 중 한 명, 즉 아이가 형이 괴롭히자 울음을 터뜨린다.

우 리는 남편들과 아내들과 어린 형제들을 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로 보는 것은 옷들을 채우고 있고 의자에서 늘어져 있는 피부 자루이다. 그 피부 자루들의 꼭대기에는 쉬지 않고 움직이는 작고 검은 점들이 있고, 그 아래에서 구멍 하나가 더러 소음을 낸다. 그 자루들은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움직이고, 때때로 그것들 중 하나가 우리를 건드린다. 구멍들은 모양이 변하고, 때때로 두 점으로부터 짭조름한 액체가 흘러나온다.
<종교본능>p. 36

사실 이 사례는 마음이론의 사례라기보다는 실체성 인식의 사례로 보인다. 주관적 관념론 철학자 버클리의 주장 대로세계를 감각적 지각의 단순한 집합체로 여긴다고 할 때 (즉 그러한 감각적 지각을 일으키는 속성을 담지하는 실체가 없는 것으로 전제할 때) 세상이 얼마나 기괴하게 나타나는 것인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보다는 제인 구달로 대표되는 내셔설지오그래픽 다큐먼터리가 불러온 편견(?)과는 달리 침팬지가 인간처럼 타인의 마음을 추론할 능력이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 마음이론이 무엇인지를 좀더 쉽게 이해하게 해줄 수 있을 것 같다.

실험 내용은 이렇다. 아크릴 칸막이로 된 두 개의 구멍 가운데 하나에 손을 내밀면 음식을 준다. A라는 사람은 눈을 뜨고 있고, B라는 사람은 눈을 감거나, 가리개로 가리거나, 뒤돌아 있거나 심지어 양동이를 뒤집어 쓰고 있다. 인간의 경우는 두살배기 아이라도 당연히 A에게 손을 내미는 것을 선호한다. 왜냐하면 자신을 보지 않고 있는 사람은 음식을 달라고 내미는 손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음식을 주려고 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즉 타인의 마음을 추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침팬지의 경우는 어느 한쪽에 특별한 선호를 하지 않는 결과를 보여주었다. 인간과 99%의 유전자 싱크로율을 보인다는 침팬지가 인간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인 타인의 마음을 추론할 수 있는 능력 즉 마음이론을 공유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 실험은 인간을 자연계와 구분되는 특수한 존재로 끌어올리려는 불순한 의도가 깔린, 방법적으로 잘못된 실험이라고 공격받는다. 침팬지가 자기 종이 아니라 인간 종의 심리 상태를 추론하라고 요구받은 것은 잘못이다, 실험용 침팬지는 자연상태의 침팬지와는 달리 인공적인 동물원에서 자란 개체이므로 종 전체를 대표할 수 없다는 등의 비판을 받게 된다. 이후 침팬지의 마음이론에 대해서는 찬반 실험이 벌어지는데, 현재까지의 결과는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침팬지에게는 인간의 마음이론과 어렴풋하게도 비슷한 능력은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한다.

이 책은 마음이론에 관한 책이다. 마음이론 하나를 인정할 때, 거기로부터 신이 나오고, 영혼이 나오고, 불멸이 나오고, 내세가 나오고, 불멸이 나오고, 운명이 나오고, 인생의 목적과 의미가 나온다. 게다가 도덕과 윤리까지도 나온다. 가히 인간판 만물의 이론이다. 인간을 정의하는 새로운 기준이 나왔다. 인간은 타자의 마음을 추론하는 존재다. 심지어 마음이 없는 곳에서도 말이다.

결론적으로 신은 적응적 환상(adoptive delusion)이다. 모든 것을 지켜보고 판단하고 처벌하는 존재로서의 신 관념을 마음이론의 의도하지 않은 부산물로 얻게된 우리의 선조들은 쾌락적, 충동적, 이기적 행동을 자제하게 됨으로써 그렇지 못한 개체들보다 사회적 추방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됨으로써 진화적으로 자연선택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도 같은 결론을 도출할 수 있겠다. 인생의 의미라는 개념을 채택한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보다 자연선택될 가능성이 높을 수 있을 것이라고. 어떤 측면에서 그럴까.

니체는 왜 사는지 아는 사람은 어떠한 고통도 이겨낼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이 말을 몸으로 증명한 로고테라피의 창시자 빅토르 프랑클은 삶의 의미를 간직함으로써 자신이 아우슈비츠의 지옥으로부터 생존할 수 있었다고 증언한 바 있다. 어쩌면 이것이 인생의 의미라는 개념을 채택한 개체의 진화적 생존가능성을 높인 대표적 사례일 수 있겠다. 약간은 다른 범주지만 기업체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나타나고 있다. 90년대 이후로 상당수 기업들이 이윤 추구를 넘어서는 가치를 기업 비전으로 표방한다. 아마도 짐 콜린스의 <Good to Great>이 나온 이후 유행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윤의 극대화가 기업의 목표라는 주장이 80년대까지 경영학 교과서에 버젓이 나왔는데, 이 책 이후로는 그 얘기가 쏙 들어간 것 같다. 이윤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일반' 기업 대비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려는 '비전' 기업이 더 오래 생존할 뿐더러 주가상승률도 훨씬 높다는 실증적 증거를 제시하자, 기업들이 너도 나도 있지도 않은 비전을 마치 사기꾼이 자기집 가훈이 정직이라고 만들어내듯이 급조해냈던 것이다. (나중에 짐 콜린스가 꼽았던 비전 기업들도 하나둘씩 망하고, 주가도 원상 복귀했다는 풍문이 떠돌기도 했다).

아무튼 제시 베링에 따르면 인생의 의미는 신과 더불어 인간의 마음이론이 실제 마음이 없는 곳까지 확대 적용되어 범주오류를 일으킴으로써 발생하게 된, 하지만 진화적 적응에는 도움이 된 환상일 뿐이다. 그런데 신 개념은 앞으로는 진화적 적응에 별로 도움이 안 될 것 같다. 기술의 발달로 전세계가 감시카메라, 위성사진, 인터넷 정보 확산망으로 뒤덮이고 CSI 식으로 과학수사가 벌어지는 세상에서는 굳이 만인을 지켜보고, 판단하고, 처벌하는 신 개념이 필요치 않다는 것. 신 없이 인간의 기술만으로 지켜보고, 판단하고, 처벌하는 데 아무 문제도 없다는 것. 그렇다면 인생의 의미는? 인생의 의미는 아직 나타난지 얼마 안 되는 (19세기 유럽에서 이제 막 출현한) 개념이므로 앞으로도 적응적 환상으로서 크게 기여할 수 있지 않을까.




heBeliefInstinctThePsychologyofSouls,Destiny,andtheMeaningofLi
카테고리 인문/사회 > 명상
지은이 Bering, Jesse/ / (WWNorton&CoInc,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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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누군가가 자살을 했을 때, 오직 그때에만 죽은 이가 살아있었다는 것을 깨닫는 경우가 있다. 좋은 예는 포르투갈 작가 페르난도 페소아의 반자전적인《불안의 책》(1916)이다. 작가는 자신의 분신격인 인물 베르나르도 소아레스의 입을 빌려 말한다. 회계원인 그는 중간급 직원인 자기가 평범한 사람임을 알면서도 은근히 지적으로 우월하다고 여기는 사람이다. 페소아는 자기의 유아론적 세계관을 동요시킨 어떤 사건을 떠올린다.

어제 그 사람들이 담배가게 직원이 자살했다고 말했을 때 나는 믿을 수 없었어. 불쌍한 녀석. 그러니까 그 녀석도 존재했었더구나! 우리 모두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가, 그것을 잊었었다. 우리는 그에 대해 겨우, 그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만큼만 알았다. 내일이면 우리는 그를 더 쉽게 잊겠지. 허나 확실한 사실은 그가 자살할 정도로 충분히 영혼을 가졌었다는 사실이야. 정념? 근심? 당연히 가졌지. 그러나 나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그리고 나머지 인류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어깨에 잘 맞지 않는 그 사람의 지저분한 모직 상의와 바보스러운 웃음에 대한 기억뿐이야. 이것이 자살할 만큼 깊은 느낌을 가진 누군가가 내게 남긴 전부야. 사실 이처럼 깊은 느낌이 아니라면 자살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종교본능> p. 32

보잘 것 없는 사람은 죽고나서야 겨우 인간 취급을 받는 경우가 있다. 왕따로 죽은 어떤 학생에 대해 왕따당할 만한 이유가 있었겠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어쩌면 이러한 생각이 흐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세상에 자신의 마음만 존재한다는 유아론이 철학적으로 황당한 헛소리라고 믿고 있는 많은 사람들도 사실은 무의식적으로 유아론의 신봉자일 수 있다.

TheBeliefInstinctThePsychologyofSouls,Destiny,andtheMeaningofLi
카테고리 인문/사회 > 명상
지은이 Bering, Jesse/ / (WWNorton&CoInc,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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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인생의 의미는 인생의 목적과 같은 말이다?
=>보통 인생의 목적과 인생의 의미를 같은 뜻으로 쓴다. 얼핏 별 차이가 느껴지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따져보면 약간의 다름이 있다. 이 약간의 다름이 커다란 차이로 귀결될 수 있다.

목적이라는 개념에는 엄밀하게 말해서 가치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생의 목적을 묻고 행복이라고 답했을 때에는 암묵적으로 가치 개념이 깔린 것으로 보이지만, 목적이라는 말 자체는 가치 요소를 빼고 쓴다고 해서 이상할 것이 전혀 없다. 예를 들어 "내 인생의 목적은 돈을 버는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사람들이 별로 윤리적이거나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는 않겠지만, 전혀 이상한 얘기는 아니다. 가치없는 것을 목적으로 추구한다고 해서 모순이 되지는 않는 것이다.

좀 더 어처구니 없는 사례로 어떤 사람이 인생의 목적을 바닷가의 모래알의 수를 정확히 세는 것으로 삼았다고 해서 그것이 인생의 목적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바닷가 모래알의 수를 정확히 세는 것에 인생을 바치는 것이 의미있는 삶이라고 보는 것은 어색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의미있는 삶이라고 할 때는 가치 개념이 어느 정도는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히틀러가 인생의 목적을 유태인을 멸종시키는 것으로 삼았다고 할 때, 그런 삶에는 목적은 있지만 의미는 없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줄리언 바지니는 의미에서 윤리를 빼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윤리는 몰라도 가치는 빼서는 안 될 것 같다.)

아무런 목적 없는 바위 굴리기 노동을 영원히 수행해야 하는 시지프스의 삶이 무의미하다고 볼 때, 목적 없는 삶은 무의미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단지 목적이 주어진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유의미한 삶이 되는 것은 아닐 수 있다. 가치 있는 목적이어야만 삶에 의미를 줄 수 있다. 의미는 목적을 포함하지만, 목적은 의미를 포함하지 못한다. 의미는 목적에 가치를 추가해야 한다. 게다가 +α가 있다. '의미=목적+가치+α'이다.

종교의바깥에서의미를찾다무신론자를위한인생안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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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앤드루 커노한 (필로소픽,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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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노직이 말하는 의미의 기준, 즉 더 넓은 가치의 연결망을 향한 자기초월의 과정이라는 정의를 받아들일 때, 의미는 가치의 특수한 형태가 된다. 현재 상태보다 더 큰 가치를 추구하는 것을 의미를 추구한다고 할 수 있다. 현재 상태를 단순 유지하는 것은 가치의 단순재생산일뿐 의미를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가치의 확대재생산을 추구할 때에 한해서만 의미를 추구한다 할 수 있다.

도시에서의 성공을 추구하지 않고 시골로 내려가 가난한 행복이나 소농공동체를 추구하는 녹색평론 김종철 씨 등의 사상을 따른다면 궁극적으로는 인류 삶의 단순재생산만 가능하지 않을까? 경제성장을 전면 부정하는 이런 생산양식을 통해서는 단순재생산도 유지되지 않으며 축소재생산을 지향하는 것으로 봐야하지 않을까? 물론 여기에는 경제성장보다 더 중요한 '영적(?)' 성장 같은 대안적 가치를 추구한다는 반론이 가능할 수 있겠다.

하지만 나의 의구심은 소농공동체를 이상향으로 추구하는 녹색당식 생산양식만으로는 몇 천년이 될지 몇 만년이 될지 몇 억년이 될지는 모르지만, 언젠가는 대두될 지구 멸망 시나리오에 대응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인류가 지구의 유한한 생존을 넘어 존속하기 위해선 상당 수준의 생산력 집중이 필요할 것인데, 녹색당식 소공동체 생산양식을 통해 인류가 태양계를 벗어날 정도의 생산력을 확보할 수 있을까. 녹색당식 생산양식은 지구가 멸망하기 전까지 인류의 자멸을 막는 대안적 기능만을 하는 것이 아닐까. 폭주하는 인류문명의 브레이크 기능은 하겠지만, 녹색당식 생활양식이 주류가 된다면, 생명계 전체로 보아 태양계를 넘어서려는 기획의 부분적 실패를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인류가 아니더라도 생명체를 대표해서 누군가는 언젠가 태양계를 벗어날 것이다. 생물학자 린 마굴리스가 말한대로 그것은 폭발하는 지구 파편에 실려가는 박테리아가 될 수도 있고, 지구멸망 이전에 멸종한 인류를 대신하여 더 발달한 지적생명체로 진화한 미국너구리가 될지도 모른다. 박테리아 생물계가 충분한 시간만 주어지면 필연적으로 지적 생명체를 만들어낸다고 볼 때, 지적 생명체 가운데 일부는 필연적으로 의미를 추구한다고 볼 때, 결국 의미를 추구하는 생명체만이 지구의 멸망, 나아가 우주의 멸망을 넘어서려는 기획을 꾀할 것이다. 우주가 자기존속을 꾀하는 생명체를 나은 데 이어, 생명계가 의미 즉 자기초월을 추구하는 지적인 생명체를 낳았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자기초월의 과정으로서의 의미 추구란 것이 궁극적으로는 불멸을 지향하며 무한으로 성장해 가는 생명계 전체의, 나아가 우주 자체의 거대한 프로젝트의 일부라고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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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존 배로 (해나무,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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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생의 의미는 없다
-인생 뭐 있어? 저 꽃을 보라. 저 꽃은 그냥 존재할 뿐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인생은 그냥 사는 거지 무슨 의미가 있다는 거냐?
=>의미는 고급 추상 개념이다. 꽃에 없는 것이 인간에게 있을 수 있다. 저 꽃을 보라, 그냥 존재할 뿐 무슨 도덕이 있는가? 맞다. 그러면 인간도 그냥 사는 거지 무슨 도덕이 있다는 거냐? 논리가 이상하지 않나? 아마존의 어떤 부족은 셋을 셀 수 없다. 3의 개념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말할 것이다. 세상에 3이 어딨어? 인생의 의미도 비슷하다. 어느 정도 의식의 발전 단계에 이르고, 높은 가치를 추구하는 경우에만 의미의 문제가 발생한다. 인생의 의미가 없다는 사람은 스스로가 식물적 존재인지, 아마존 부족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2. 인생의 의미에 대해 단답형으로 답할 수 있다.
인생의 의미는? 신입니다. 사랑이죠. 돈 아닐까요? 아니 성공이지. 아니야 자손을 남기는 거야. 뭐라고? 도가도 비상도 몰라? 한심한 것들, 왜 사냐면 웃어야지.
=> 단답형 문답에 익숙해서인지 우리는 인생의 의미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들으면 본능적으로 그 '무엇'에 해당하는 네모칸을 머리 속에 떠올리고 그 네모칸을 채울 수 있는 하나의 정답, 단답형 대답을 찾아내려고 발버둥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는 위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저마다의 신주단지를 내세우며 이것이 진리라고 우긴다. 틀렸다. 인생의 의미는 단답형 질문이 아니라 복합질문이다. 의미의 의미(meanings of meaning)은 영어로 500개쯤 되고 이 가운데 철학적으로 유의미한 것만 추려도 7개쯤 나온다. 이 7개를 뭉뚱그려서 하는 질문이 바로 인생의 의미를 묻는 질문이다.

따라서 인생의 의미를 묻기 전에 의미의 의미를 먼저 정해야 한다. 질문의 바운더리를 너도 알고 나도 아는 방식으로 합의해야 한다. 어떤 사람이 인생의 의미를 묻는 것은 사실은 질문이 아니라 인생의 허무에 대한 절망의 탄식일 수 있다. 이 사람은 질문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것에 불과하다. 이런 사람은 일단 아웃이다. 철학 토론이 아니라 심리상담 쪽으로 보내야 한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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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인문/사회 > 철학
지은이 Klemke, E. D. (OxfordUSA,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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